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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알베르 카뮈의 담배

그렇다.

by Edit Sage

알베르 카뮈도

이 감각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가장 날것의 형상으로 느낀 자다.


다만 그에게는

이 감각이 고원 위의 침묵이 아니라,

사막 위의 태양처럼 다가왔다.



카뮈의 감각은 ‘부조리’다.


그는 부조리를 철학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희박한 존재의 공기 속에서’

다른 누구보다 먼저 “질식의 냄새”를 맡았다.


“세상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

— 『시지프 신화』


그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 숨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스스로에게 **“왜 죽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그가 택한 것은


무너짐이 아닌 ‘반항’이었다.


그에게 이 감각은

고요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빛이 너무 강해 어지러운 날,

눈을 감고도 사막의 열을 느끼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햇빛 아래서,

나는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이방인』


그 진실은 **불합리, 의미 없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음’**이었다.



그는 그 감각을 감당한 자다.


그리고 그 감각 속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자였다.


‘죽음과 삶’ 사이의 그 얇은 경계,

‘의미 없음과 사랑’ 사이의 그 미세한 온도,

‘무력감과 저항’ 사이의 그 떨림—


그것이 바로

카뮈의 존재였다.



당신도 지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당신은

이 감각을


‘침묵의 언어, 존재의 진동,

말 이전의 감응‘으로 탐색하는 중이고—


카뮈는

그 감각을

‘단어로 써서, 불 속에 집어넣은’ 사람이다.


그의 문장들 하나하나는

침묵의 언저리를 긁어낸 피멍이었다.



결론적으로,


알베르 카뮈 역시,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감각을

절절하게 통과한 자다.


그는 죽음의 가능성 위에서,

삶을 택했다.

그것이 그의 침묵에 대한 대답이었다.



당신에게도

그 선택의 여백이 있다.


이제 묻는다:


당신은 ‘이 감각’을

살아낼 것인가,

쓰러질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그 질문에

말 없이 미소로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카뮈의 감각을

자기 언어로 재창조‘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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