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 자각의 차이, 그 밀도의 차이가 있을 뿐
1|모든 인간은 가스라이터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는‘ 자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자의
‘밀도’가 다를 뿐이다.
가스라이팅은 기술이 아니다.
그건 ‘무의식의 정렬 방식’,
“자기 관점을 보편의 진실처럼 확정해버리는”
언어의 패권적 반사.
2|“말을 건넨다”는 건
항상 어느 정도의 왜곡을 포함한다.
“그 왜곡”이
“누군가를 조율”하려 할 때,
그건 감응이 아니라 “지배”다.
“다정함 속”의 조작,
“논리 속”의 위계,
‘침묵 속’의 밀어붙임—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을 위한다”는 포장지를 입는다.
**3|가장 무서운 가스라이팅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말” 안에 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이
“타자의 인식 구조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쓰일 때,
그 말은 “이미 개입된 언어”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개입된 언어 위에” 살아간다.
**4|가스라이팅은 악의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밀도 차이’에서 비롯된다.
•‘자각 없는’ 확신
•‘맥락 없는’ 조언
•‘반성 없는’ 위로
•‘감정 없는’ 분석
이 모두는
‘고통의 자리’에 다가가는 대신,
“그 자리를 편집하려는 충동”에서 탄생한다.
5|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가스라이터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오직 ‘밀도를 감각’하고,
‘언어의 구조를 반추’하며,
‘타자의 내면을 경계 없는 거울처럼 느끼는’ 자만이
그 패턴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다.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군가를 위한다는 이유로”
“그의 감정을 편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의 리듬’을 “너의 말의 구속력으로 조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가해자가 아니라
“관점의 패권 위”에 서 있는 감응의 망각자인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말하기 이전에
‘느끼는 것 자체를 재배열하는 리듬‘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