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르시시스트 그녀.

by 다림

지영: (속삭이듯) 안녕하세요? (찡긋)

민주: 안녕하세요? (찡긋)


지영은 새롭게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 지, 이번 달로 8개월 차가 되었다. 그 사이 2년을 채운 동료 연구원은 기간만료로 퇴직을 하였고, 그 사이 10개월 간 공석이었던 연구교수 자리에도 새로운 사람이 임용되었다. 지영은 한달간 동료 연구원이 없이 묵묵하게 두 사람 몫을 해 내었고, 다행히 지난달 부터는 민주씨가 들어오면서 부담이 줄었다.


'그래,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분위기가 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지영은 혼자서 두 사람의 몫의 일을 하느라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연구교수 자리에 새로 임용된 상사때문에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지영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4개월 뒤 새롭게 상사가 임용되었는데, 그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다.


그녀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기까지 지영은 많은 혼란을 겪었다. 인사를 해도 제대로 받지 않고, 항상 불만가득한 뚱한 표정인 그녀. 일에 대한 피드백은 항상 한숨이 섞여 있었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면 그러했을 것이다. 지영은 스스로가 무엇이 부족했나, 돌아보고 움추러들었다. 기분을 풀어주려 했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려 했고, 진심으로 이 곳에서 그녀가 잘 적응하기를 바랐다.


두달여간 지영은 그녀의 감정쓰레기통이었다. 연구과제 도중,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연구원에 대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몸이 아파 보여 다독여 주려하면, 본인 음료 심부름을 시키는 그녀였다. 두달여간 지영은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은 그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서 그렇겠거니 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지영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녀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은 공포감과 불안감이 몰려왔다. 2년을 채우고 퇴직한 연구원의 마지막달 모습을 보며 '착취적', '도구화' 라는 말의 뜻을 실감했다. 지영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고, 이미 시작되는 중이었다.


이렇게 피상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와 지영은 전혀 감정적인 교류가 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일방적이었고, 타인의 관점에 대한 수용이나 최소한의 배려 따위 없었다. 언제나 그녀는 정답이었고, 지영은 오답이었다. 다른 생각에 대한 포용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지영의 말은 언제나 왜곡되어 이해되고, 설명이나 변명을 할 수 밖에 없는, 대화를 하고 나면 뒷골이 땡기기 일쑤였다.


지영은 그녀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더 힘들어졌다. 차라리 그녀를 좋게 보며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때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하나부터 열까지 있는 그대로 따지고 보니, 지영에게는 너무나 '예측불가능하고 무례한' '맷돼지'와 같은 존재였고, 이를 오롯이 혼자 버텨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평판관리를 중요시 하는 그녀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지영만 독박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지영은 20년을 가까이 알고 지낸, 제 2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희진쌤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연구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든든한 교수님들께도 이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남편에게도 이야기를 했고, 답답한 마음과 위축되는 마음을 위로 받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 요동쳤다. 쉴새없이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잠들기 전 애꿎은 유투브 채널만 돌려볼 뿐이었다. 늦은 취침은 피곤한 아침을 불러올 뿐이었고, 출근길에 한숨이 더해졌을 뿐이다.


주 5일을 9-6로 마주쳐야 했기에 더 힘들었다. 처음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 할 때에는 그녀에 대한 분석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 지영은 함몰되어 있었다. 지영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문제였는지, 어디서부터 그녀의 문제였을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다만, 그런 상황에 처했고, 힘들었다. 지영은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녀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해 보였다. 고분고분한 새 직원이 들어오면서는 보란듯이 차별대우하기 시작했다.

마치, '봐, 나한테 도전하면 어떻게 되는지?'라고 협박이라도 하듯이


근데 뭐 지영은 나름 그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감정쓰레기통 일때보다는 나았다. 새로 들어온 민주씨가 범퍼역할을 해 주어 고마웠고, 잘 적응했으면 했다. 최대한 업무와 관련된 대화만 나누면 그만이었다. 시시때때로 그녀는 본인 입맛에 맞게 소소한 룰을 만들어냈다. 일방적이었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지영은 그녀와 대면하지 않을 때에도, 집에 가서도, 주말에 여행을 다니면서도 온통 머릿속에 그녀로 가득찼다. 무엇이 지영을 그토록 괴롭게 만든 것일까. 인정받지 못해서? 관계가 불편해져서? 지영은 그 이유를 또렷히 알아챌 수 없었다. 무언가 많은 이유들이 뒤섞여 있었고, 가슴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잠시 다른 것으로 생각을 옮겨 보려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또 다시 그녀는 지영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지영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그녀를 보내주고 싶었다. 너무 많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그녀를 위해 쓴다는 것이 몹시 싫었다. 누구든 그걸 좋아하겠는가만은.


쏜살처럼 주말이 지나고 또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지영은 오늘도 그녀의 면상을 볼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만큼은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했다. 한번 들이받아볼까? 생각도 했다가, 당장이라도 그만둬버릴까? 생각도 했다가.

그런 생각들도 머릿속이 무거워질때쯤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오늘 연차다.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래서 사서하는 걱정은 부질없구나 지영은 허탈했다. 완전무장을 하고 나왔는데, 적수가 없어진 상황이랄까.

곱씹고 곱씹어 오늘은 좀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겠다 다짐했던 지영의 방어력이 무의미해졌다.

그래도 지영은 좋았다. 시간이 평소보다 빨리 지나가는 듯 했다. 마음이 편안했고, 그녀의 영향력을 대단했다.

그녀가 사무실에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 있는 듯한 존재였다.


(카톡) 인권센터, 2025년 인권실태조사 참여 안내


지영은 인권실태조사 설문을 클릭했다. 어쩌면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링크를 클릭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성폭력이나 폭행, 성차별, 인종 차별 그런 심각한 차별은 아니었지만, 지영은 분명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설문링크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있지는 않을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는 않을지 절실한 마음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지영은 인권센터를 방문하지 않는 이유에 '인권센터에 찾아갈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문항이 가슴에 와닿았다. 지영 역시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럼 나도 찾아가 봐도 될까?',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생각했다.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로 인권센터는 좀 아닌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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