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은 계약기간이 11개월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계약기간을 채용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채용공고에는 지영을 뽑은 센터를 포함하여 여러 센터의 전문연구원을 뽑고 있었다. 석사연구원과 박사연구원, 연구교수는 센터별로 고용계약 조건이 다소 상이했다. 지영은 본래 지금의 센터로 지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모호한 부분이 있었고, 결론적으로는 지금의 결정에 동의했고, 채용되고 보니 계약조건이 11개월이었다.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지영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 센터에서 11개월 간 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11개월의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이 다가왔고, 재임용 면접날이 되었다. 어떤 분위기 속에서 어떤 면접을 보게 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재임용 면접 전에 자신이 11개월간 어떤 업무를 수행했는지를 제출했을 뿐이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면접을 보겠거니 했다. 어느 정도는 형식적인 절차라고도 생각했다.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별일 있을까 싶었다. 근태관리도 업무에 대해서도 자신있었던 지영은 당당하게 면접에 들어섰다.
지영은 재임용 면접에서 자신의 역할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박사급 연구원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했어야 할 행정업무였다고 한다. 그 이상으로 연구과제를 적극적으로 리드했어야 했단고 한다. 황당한 질문 중에 하나는 '이 센터에서 진행되는 연구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나?'라는 것이었다. 지영은 이 질문이 몹시 뒷골당겼다. 이것은 그녀가 파놓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재임용 면접 내내 두 면접관은 지영을 질책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 같았다. 면접 내내 쏟아지는 질책에 면접 말미에 나마 정신이 든 지영의 "저는 저의 역할이라고 알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말은 허공에 씁쓸하게 흩어졌다.
면접을 보고 나온 지영은 어쩌면 재임용이 안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원래 이런 분위기로 면접을 보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조직이고 면접관들이었다.
저들이 말한 저 역할들이 정말로 지영의 역할이었아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그 역할을 했어야 했다면, 얼마나 이 조직이 말도 안되게 체계적이지 못한 것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채용공고를 다시 조회해 보았다. 지영은 11개월 전 채용공고를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이 곳은 행정업무를 하는 곳이구나. ', 그리고 처음 채용이 되고 나서 이 센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지영은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것을 놓친 것인가 돌아보았다.
지영은 작년 4월에 채용되었다. 이 센터는 연구교수 1명과 전문연구원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구교수의 자리를 공석으로 된지 10개월 가량되었고, 다른 센터에서 겸임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2년 임기만료를 앞둔 석사급 전문연구원이 한명 있었고, 그 나머지 자리에 내가 채용된 것이었다. 줄곧 박사급 연구원도 채용은 되었으나 다들 금방 그만두고 퇴사를 했다고 했다. 전문연구원이라고 뽑아놓고, 막상 행정업무만 해야 되니 다른 연구할 자리가 생기면 옮긴다고 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과제들은 연구교수가 도맡아서 한다고 했다. 연구교수가 연구원들에게 자료를 요청하면 협력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지영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연구경력이 쌓이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퇴사를 한다면, 여기에서 연구도 함께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실제 겸임으로 있던 조교수 또한 이 곳에서의 연구과제를 논문으로 연결시켜 실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그녀가 처음 채용되었을 때 지영이 공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이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과제들은 논문으로 쓰기 까지의 주제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지영은 이미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이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과제들이 아주 필수적인것은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
.
.
지영은 타임라인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디서 부터 뭐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지영은 4월에 채용되었고, 7월에 연구교수의 제안을 받아 면접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그녀도 면접을 보게 되었고, 이 센터의 전공과도 일치하는 그녀가 연구교수가 된 것이었다. 그 결과 또한 지영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지영은 그 당시 연구교수의 제안을 받았을 때 조차도 그 자리가 쥐약일지 아닐지 긴가민가했다. 썩 매력적이지도 않았을 뿐더라,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적임자가 연구교수의 자리에 오는 것이 반가웠다. 지영에게 상사는 부모의 자리와도 같았기에 공석이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7월부터 그녀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8월이 되었을때, 2년 계약만료로 연구원이 퇴사하였다. 둘이 남게 된 것이다. 8월부터 이미 시그널을 있었으나 지영은 둘 밖에 안남았는데 어쩌겠냐 하고 넘어갔다. 9월이 되었다. 여전히 공석이 채워지지 않았다. 공석이 언제 채워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석이 길게 갈수도 있고, 채용을 해도 금방 그만둘 수도 있는 소속이다 보니 부담감이 컸다.
8월즈음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듣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연구원들이 하는일에 자신이 신경을 쓰는게 정상은 아닌것 같다고. 지영은 그때 손절했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지영은 자신이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상황에 연구원 두 사람의 몫을 다 하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것은 후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는 최선이었으리라.
그녀는 지나가듯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연구를 백업해 줄 연구원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지영을 의미하는지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문연구원이 한 명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영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를 백업해 달라는 뜻으로 이해될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새로운 연구원이 들어오고, 다시 역할을 재분배하는 타이밍이 있었음에도 업무분장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결론은 그녀 혼자서 나에 대한 탓을 하면서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지영을 감정적으로 대했다고 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쪼록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행히 한달간의 공백을 깨고 바로 공석이 채워진 것이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영은 어의가 없다. 지영은 공석이 언제까지일지 모를 불안이 있었고,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서류에는 몇명이 지원했는지, 면접은 보는지, 이번에 채용이 결정이 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지영은 서류지원자가 있다는 소식에도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꼈고, 면접소식에도 희망을 가졌으며, 다음 달 부터 출근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소식을 그녀에게 하나하나 전달할 때마다 '서류에서 붙었어도 면접을 보러 와야죠.', '면접을 봤어도 합격이 되야죠.', '합격을 했어도 출근을 해야죠.', '계속 다녀야 다니는거죠.' ... '할말하않'이다.
"쎄함을 느꼈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느낀 자신을 믿어야 한다."
수많은 쎄함의 포인트들을 뒤로하고, 결국에는 그녀가 파 놓은 함정에 덥석 걸린 꼴이라니.
그녀 또한 지영과 재계약 시점이 동일했던 관계로 오전에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오후에 지영이 면접을 본 것이었다.
재임용에서 나온 질문들은 면접관들 스스로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고,
재임용 면접이 끝난 후, 그녀의 부드러워진 태도는 합리적 의심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