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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무 Sep 14. 2023

운명에 관한 소고

오십 넘어 살다 보니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 맞는 걸까? 새삼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운이니 팔자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실패자들의 넋두리로만 치부했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사주팔자가 어디 있어?'라는 당찬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니 노력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구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정말 정해진 사주팔자나 운명이 있는 걸까?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온다" 솔로몬 왕이 어느 날 잠을 자다 꿈을 꿨다. 솔로몬 왕에게는 총명하고 귀여운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의 남편 될 사람이 꿈에 나타난 것이다. 꿈에서 본 예비 사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솔로몬 왕은 딸을 외딴섬에 있는 별궁으로 보내 사람들과 만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담을 높게 쌓고 경비병을 배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커다란 새가 죽은 사자를 낚아채 날다가 힘겨워지자 사자를 솔로몬 왕의 딸이 갇힌 별궁에 떨어뜨렸다. 공교롭게도 죽은 사자의 사체 안에는 솔로몬 왕이 꿈에서 본 예비사위가 들어 있었다. 들판을 헤매다 날이 저물어 추워지자 사자의 사체 속에 들어가 잠을 잤던 것이다. 결국 그 청년은 솔로몬 왕의 딸을 만나게 되었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이야기다.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처음 보는 순간 운명의 짝임을 감지했다거나 결혼하게 될 인연인 줄 한눈에 알아봤다는 말을 종종 한다. 운명의 이끌림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인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을 마치 운명처럼 미화시킨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80억 지구인 가운데 만난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솔로몬 왕의 딸과 사위처럼 커다란 새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인연이 맺어지는 커플이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옛날 미국 텍사스에 신들린 총솜씨를 자랑하는 전설적 카우보이가 살고 있었다. 총을 쏘았다 하면 표적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정 중앙을 맞췄다.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알고 보니 철저한 사기극이었다. 총알이 맞은 지점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려 과녁인 것처럼 속였던 것이다. 무작위로 발생한 데이터를 자신의 논리나 관점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Texas sharpshooter fallacy)라고 한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인위적 질서를 덧붙여 전체 맥락은 무시하고 특정 데이터에만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는 논리적 오류를 뜻한다. 우연이 일어난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원인을 왜곡하고 이유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 서로를 운명의 짝이라고 믿게 되면 둘 사이에 잘 맞는 부분보다 잘 맞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음에도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고 서로 잘 맞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 해석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쉽다. 우연하게 몇 가지가 일치해 호감을 가졌음에도 마치 모든 것이 잘 맞는 사람이라는 왜곡된 이유와 원인을 만들어 운명이라 믿는 것이다. 전형적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일의 결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공할 확률 50%, 실패할 확률 50%이다. 우연하게 성공하고 난 후 왜곡된 원인을 성공의 이유로 설명한다. 사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우연의 결과이자 혼돈과 무질서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친구를 사귀다 보니 친절한 사람이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면 경상도 사람은 친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친구를 사귀다 보니 친절한 사람이 모두 전라도 출신이었다면 전라도 사람이 친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친절한 성향은 출신 지역과는 무관한데도 그렇게 생각할 공산이 크다. 이렇듯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패턴을 만들고 원인을 찾다 보면 왜곡되고 잘못된 이유를 갖다 붙여 해석하게 된다.  




살면서 감당하기 힘들거나 버티기 힘든 일 중 하나는 단연코 불확실성이다. 우연이나 카오스가 빚어낸 결과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왜곡된 원인을 끌어다 붙이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우연히 나타난 결과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그러한 연유로 실제 일어난 결과와 전혀 무관한 원인과 이유를 찾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불확실하고 불명확하더라도 우연과 무질서, 혼돈이 만들어낸 결과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우연과 무질서, 혼돈이 빚어낸 결과를 누군가는 운명이나 팔자로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해석하려 하면 인지적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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