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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무 Aug 01. 2024

원한의 칼

법정 스님의 <원한의 칼>은 다음과 같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때문에 존재한다.

서로서로의 한 부분이다.    

 

증오라는 원한의 칼로 남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 칼이 자기 자신을 먼저 찌르지 않고는

맞은편에 닿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나의 안티(anti)가 되어 사사건건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좋은 의도로 한 말을 곡해하여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으로 건네는 이야기조차 긍정적으로 해석해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다. 인연 있어 만나는 모든 이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나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아니라 꽤 지속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이라면 애증의 관계가 형성될 확률이 높다. 상대방이 적의와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공격하면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용서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상처를 준 타인을 미워하고 되갚아 주려는 원한의 칼을 세우는 건 용서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용서이다. 그러나 용서보다 더 힘든 건 완전히 나를 파멸시키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지옥을 헤매게 하는 복수심과 원한이다. 남에게 받은 만큼 상처 주고 되갚아주기 위해선 그 칼로 먼저 나를 찔러야 상대에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복수는 무관심과 무시가 아닐까,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완벽하게 흔적조차 없애는 것, 그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끝까지 맞설 용기 없는 자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나이 들고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땅에 머물다 갈 시간도 많지 않은데 좀 더 하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일, 즐거운 일에 남아있는 삶의 시간을 쏟고 싶다. 물론 그렇게 사는데도 원한과 증오에 살이 떨리는 억울한 일이라면 바로잡아야 맞다.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세상엔 많으니까.

죽을 각오로 덤비면 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당시에는 혈압이 상승하고 살이 벌벌 떨리는 억울한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억울한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잊혔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이제부터라도 '사납 떼기'라는 소릴 듣더라도 예전처럼 사람 좋은 양 무조건 참고 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착하다는 욕(?)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착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여전히 착하다는 소릴 듣고 살고 있다. "이 머선 일이고?"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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