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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무 Sep 19. 2024

취미 있는 삶을 살 것이다.

우리 사회도 워라밸을 중시하면서 예전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여가 시간이 많아졌다. 워라밸이란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를 줄여 일컫는 말로 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주어진 여가 시간을 즐겁게 보낼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자신이 무엇을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사실 아프기 전 나도 그랬다.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게다가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라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지치고 피곤했다. 에너지가 소진되고 방전되었다. 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집에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힘들고 지쳐 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쉬고 나면 고갈된 에너지가 어느 정도 충전되긴 했지만 회복되진 않았다. 즐겁고 유용한 시간도 아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에 몰두하는 삶은 활력을 주지 못했다. 정말로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 있었다면 훨씬 생동감 넘쳤을 것이다. 일이 힘들고 인간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아무리 많더라도 취미가 있었다면 순수한 몰입의 경험으로 내면에 기쁨이 넘치고 활력이 넘쳐 사회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을 상쇄시켰을지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치어리딩 클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난소암 환자인 마사(다이앤 키튼 분)는 웰다잉을 위해 실버타운에 오게 된다. 그 실버타운에는 각종 동호회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동아리 중에 하나 이상 가입하는 것이 입주 조건이었다. 마사는 셰릴과 함께 치어리딩 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암환자가 아니라 자신의 어릴 적 꿈이었던 치어리더가 되는 꿈을 이루어나가는 도전과 열정의 아이콘이 된다. 영화 속 주인공 마사가 했던 말, "나 곧 죽어. 글쎄 어제도 죽어가고 있었고 다음 주에도 죽음을 향해 가겠지만 그동안에 온 힘을 다해 춤을 춰야 할 거 아냐.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어?"라는 영화 속 대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영화 속 마사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과 조우한다. 죽을 걸 알지만 그래도 오늘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죽을 걸 알지만 온 힘을 다해 오늘 춤을 추고 있는 마사처럼 죽음의 공포조차 잊을 수 있는 취미가 있다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취미란 나다울 수 있도록 내 삶의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취향이자 조건이며 개인의 프로필이기도 하다. 취미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과는 구분된다. 그렇다고 취미라고 해서 모두 쉽고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힘든데도 등산을 하고 마라톤에 도전하기도 한다. 영화 <치어리딩 클럽>의 할머니들처럼 할머니가 하기엔 어렵고 힘든 치어리딩에 도전하기도 한다. 치어리딩은 대부분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며 실제로 신체적 연령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표현할 수 있는 동작의 난이도도 신체적 연령에 따라 달라진다. 유연성도 떨어지고 가만히 있어도 관절이 쑤시고 아픈 나이의 할머니들에게 치어리딩이 쉬울 리 없다. 가족의 반대와 실버타운 운영위원회 회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기꺼이 치어리딩에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온전한 몰입을 경험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누구나 역경과 고난을 만난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고통에서 허우적대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 그 차이는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취미의 유무다.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은 「오티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오랜 시간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을 상담했는데 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아픈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위로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그들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보다 커서라기보다 스스로가 자신의 불행을 위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치유란 고통을 줄어들 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 자체가 주는 기쁨을 통해 활력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외부적 보상이 주워지지 않아도 즐겁고 재미있어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면 온전한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그게 바로 치유인 셈이다. 즉 취미를 통해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지닌 상처와 트라우마,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종교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고통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 온전한 몰입을 경함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게 되면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상처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지만 그것을 떨쳐낼 수 있는 활력이 생기기 때문에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치유받기 위해 취미를 가져야 하는  아니다. 취미는 개인의 시대에 가장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나다움'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어떠한 취미 활동을 하는지, 주어진 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보내는지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 나만의 개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타자와 구별되는 '나'라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취미이다. 나를 알아야 '나'라는 콘텐츠를 채울 수 있다. 내가 다시 산다면 정말 좋아서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 취미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위로하고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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