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성향을 모르는 처음에는 나름 조심한다. 자기는 중도 성향인 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가 발전하면 금방 성향이 드러난다. 그래도 여전히 자기는 팩트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우긴다. 잘 들어보면 자신이 지지하는 쪽의 주장들을 모은 것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리한 증거를 모은다. 확증편향이다. 이것은 거의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이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중도는 양쪽 이야기를 경청한다. 귀를 열고 잘 들은후 진영논리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결정한다.
정치적 우파와 좌파는 정치를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유전 코드로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너던 하이트의 책 ‘바른 마음’의 내용처럼,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좌파와 우파는 뇌 구조가 다르다고 한다. 보수적 성향의 사람의 뇌가 더 유연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반드시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하여가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의 뇌가 변하지 않아서 좋다는 뜻도 아니다. 어떤 도그마에 꽂히면 아무리 반증을 해도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양비론이라고 욕하지 마시길...) 자신의 뜻과 다르면 타협하지 않고 부러지거나, 바뀌면 중도가 아니라 과거와 완전 반대편으로 전향한다. 또 도그마에 유리한 증거만 찾는다.
진보는 변화를 기반으로 하고 보수는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는데 뇌구조는 서로 반대 성향을 가지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뇌구조가 다른 부족이니 서로 싫어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설득은 아예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퍼붓는다. 남이 하는 이야기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아 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은 많은 조사와 준비를 해놓고 대화를 시작하니, 교사의 모드가 되어 상대방을 학생 취급하며 질문을 한 뒤 답을 제대로 못하면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귀마개를 장착하고 확성기만 들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은 전혀 바뀔 용의가 없는 채로, 자기의 논리와 증거를 들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고유의 코드가 있고, 살아온 인생에서 얻은 가치관이 있다. 어쩌면 말로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글로는 가끔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어느 쪽 진영인가를 떠나서 대화 중 자기가 말하는 비율이 60%가 넘는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는 뜻이고 상대방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친구는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사이다. 누구도 친구와의 대화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가끔 대화에서 디베이트의 규칙을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주제를 임의로 그 자리에서 고르고, 양쪽에 생각할 시간도, 말할 시간도 똑같이 주는 것이다. 반대편에게 질문할 기회도 주는데 그러려면 일단 상대방의 주장을 잘 들어야만 한다.
또는 편안한 대화에서,정치적 주제나 입장을 피력하는 주제는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문학이나 영화나 예술 같은 컨텐트가 있는 주제라면 서로 불편하지 않게 판단을 떠나 생각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고유색을 버리고 남의 말을 그대로 따르거나,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무엇이든 역지사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옳음과 상대방의 옳음이 다를수도 있다고 인정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에게 자신과 다른 성향과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시대와 종교와 지역을 초월한 황금률이 있다. 그것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남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고 싶지 않은 만큼, 남에게도 내 말을 일방적으로 하지않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중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