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탑>-자신의 파편들을 쌓아 올리다

홍상수의 자기 설명, 해명, 변명?

by 윤병옥

사생활이 논란이 되면서 좋아하던 홍상수의 영화를 안 본 때도 있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는 쿨한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원래 좋아하던 감독이었고 다시 비판적인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스캔들 이후에 만든 그의 영화 세계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 작품은 다시 마음을 돌이키게 만든 작품이었다. 예전에도 남자들의 지질한 마음을 잘 표현해서 혀를 차고 웃으며 영화를 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더욱 스스로에게 극한으로 솔직할 수 있는 작가를 보며 감탄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울 어느 지역에 작고 위로 길쭉한 건물이 하나 있다. 영화감독 병수가 딸 정수를 데리고 건물주이면서 인테리어 사업자인 해옥을 찾아온다.

1층 레스토랑에서 해옥은 그들을 맞는다. 식사를 끝내고 건물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와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간다.

2층은 어떤 여자가 하는 원테이블 개인 식당이라고 하고 예약이 필수이며 언제 한번 그곳에서 식사하자고 한다.

3층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다고 하며 해옥이 남의 집의 현관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가는데, 이곳은 다 터놓고 친하게 사는 건물이라 괜찮다고 한다.

4층은 옥탑방으로 매우 좁지만 나머지 공간을 야외 테라스로 쓸 수 있고 화가가 혼자 살고 있으며, 집세를 못 내서 곧 제주도로 가면서 방을 뺄 것이라고 한다.

건물 구경을 마치고 모두 해옥의 개인 공간인 지하로 내려와서, 병수는 딸이 미술이 전공이지만 인테리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며 거두어 달라고 부탁한다. 대화 도중에 전화를 받은 병수는 영화 관련해서 급히 사람을 만나러 근처에 잠깐 다녀오겠다며 해옥과 정수만을 남기고 나간다.

병수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정수는 해옥에게 아버지를 5년 만에 만난다며, 그가 영화를 시작하며 여자관계가 복잡해졌고 엄마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밖에서는 아버지를 감독으로 대단하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보는 아버지는 겁이 많고 머리가 좋은 여우일 뿐이라고 한다. 이때 해옥은 밖에서의 모습도 그의 한 부분 아니냐며 그게 더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변호한다.

와인이 떨어지자 정수는 편의점으로 가서 사 오겠다며 밖으로 나온다.


병수가 혼자서 해옥을 찾아온다. 그녀는 반갑게 맞으며 마침 2층 개인식당에 예약이 없으니 식사하자고 하고 그곳으로 데려간다. 나중에 합석한 식당 주인 선희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다. 그녀는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고 다 봤다며, 술 한잔 마시고 깔깔 웃으면서 그의 영화를 본다고 하고, 대사가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러워서 좋다고 칭찬한다.

병수는 영화 만들 때 투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막판에 엎어지는 경우도 많고 투자자는 흥행해서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해서 영화를 좌지우지한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모두 술이 오르고 선희가 병수에게 영화를 오래오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병수는 그녀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3층 살림집에서 병수는 설거지를 하고 있고 선희는 식료품을 사가지고 들어온다. 둘은 동거하는 것이다. 건강 때문에 와인도 줄이고 채식을 하고 있는 병수를 위해 선희는 샐러드를 만들어 함께 식사하는데 그녀는 자신은 가끔 고기도 먹어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외국에서 인기 있는 감독인 그의 회고전이 열리는데 선희는 바람 쐬러 함께 참석하고 싶어 하지만, 감독에게만 항공료를 제공하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그들에게 그녀의 항공료는 부담이 되고, 그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

며칠 후 선희는 친구를 만나러 나가겠다고 하는데, 그 친구는 그들 커플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병수가 싫어하는 인물이고 선희도 한동안 만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너무 답답하니 다시 만나겠다는 것이다.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선희를 기다리다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와 누운 병수는 자신은 혼자 사는 게 맞는 사람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누워있는데, 거실에서는 외출에서 돌아온 선희와 또 다른 도플갱어인 병수가 그녀의 외출에 대해 쿨한척 하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4층 옥탑방에 누워있는 병수가 보이고, 부동산 사업자 지영이 문을 따고 들어온다. 그녀는 맛있는 고기를 사가지고 왔다고 하고 병수는 그녀를 방으로 불러들인다. 잠시 후 옥상 테라스로 나온 그들은 고기를 구워 소주와 함께 먹고 지영은 정력에 좋은 산삼을 꿀에 재워 왔다며 먹이고 연신 그가 귀엽다고 쓰다듬는다. 이때 건물주 해옥이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자 왜 비밀 번호를 바꿨냐고 따지며 고지서를 준다. 내용은 전처의 교통 범칙금 고지서이다. 지영이 병수에게 그녀와 엮이는 거 싫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한다.

병수는 지영에게 얼마 전 하나님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제주도에 가서 12편의 영화를 만들라는 계시를 주셨다고 하고, 지영은 그가 순수한 사람이라 신이 축복을 준 것이라고 한다. 둘은 함께 드라이브하자며 집을 나섰는데, 부동산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고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지영이 볼일을 보러 간다. 그는 건물 앞에 있는 자신의 차에 오른다.


병수가 차에서 내린다. 그때 딸 정수가 편의점에서 와인과 안주를 산 봉지를 들고 걸어오며 왜 이렇게 늦었냐고 말한다. 영화사 대표가 병수와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해서 만났는데 중국 소설 원작이 있는 작품이어서 같이 하기는 어렵겠다고 이야기하느라 늦었다고 말한다.

정수가 해옥이 기다리고 있으니 담배 그만 피우고 빨리 들어오라고 하며 먼저 들어가고, 병수는 두 번째 담배를 물며 허공을 바라본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실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다 떠오르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이고 싶은 측면을 강조하고 치부는 숨기기 마련인데, 작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다 까발릴 수 있나 싶게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지난 가족 관계뿐 아니라 현재 유지하고 있는 관계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모든 층에 존재하는 그는, 그를 이루고 있는 파편들이다. 또한 주변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인상도 다 그의 파편들이다.

자신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돌보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도 진심이고, 영화에서는 딸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아이엄마의 처지와 마음을 알고 있는 것도 작가이다. 주변에서 그에게 관심을 주는 많은 여자들에게 쉽게 반하는 사람도 그이고, 실제로 그중의 하나와 집을 나와 사는 것도 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태생은, 사랑은 하되 혼자 지내는 것이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과의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같이 사는 상대도 비난과 제약 때문에 외롭고 힘들다는 것도 그는 안다. 이성으로는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로 힘든 그는 신이 자신에게 영화를 만드는 소명을 주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본능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챙겨주는 여성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가 재능이 많아 제작, 감독, 감독, 편집, 음악까지 다 맡아서 북 치고 장구 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투자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는 것도 드러낸다. 그는 돈 가진 사람이 예술까지 좌지우지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의 영화가 가끔 드러내는 방법적 불편함은 자본이 부족해서 촬영 장소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여러 전문가를 고용하여 손질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 영화에서는 가끔씩 남녀 사이의 대사의 내용과 방식이 너무 오그라들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희의 대사가 듣기가 어색했다. 스스로의 작품들에 대해 듣고 싶은 칭찬을 스스로 한다는 느낌이랄까. 대사가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너무 직접적으로 하고싶은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구조는 주인공이 딸을 데리고 해옥의 소유인 탑처럼 생긴 건물에 와서 모든 층을 다 구경하고 지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 돌아오고 딸도 편의점에 다녀오며 다시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옥에게 돌아가는 현실의 이야기와, 주인공이 조금 전 구경했던 2,3,4층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플롯으로 되어있다. 그동안 작가는 여러 다른 영화에서도 현실과 환상을 왔다 갔다 하는 상상력을 보여왔었다.

또 좁고 높은 건물과, 불교 사찰에서 보는 탑과, 직립한 인간의 유사한 이미지에서 탑처럼 생긴 건물을 주인공의 은유로 사용한 작가의 감각도 놀랍다.

현실이든 상상이든 건물의 모든 층과 건물의 안과 밖에서 존재하는 병수는 다 그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마치 벽돌을 쌓아 여러층의 건물을 만들고, 단을 쌓아 탑을 만들 듯 각각의 측면들이 모여서 그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벽돌 하나나, 탑의 한 층을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 또는 안과 밖, 즉 인간관계나 그의 업적만을 보고 그를 판단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한 측면으로만 이해받는 게 억울하다고 영화 중 해옥의 입으로 항변한다. 다른 면이 더 진짜일지도 모르지 않냐는 것이다.

물론 부분의 산술적인 합이 전체일 수는 없다. 또 인간을 한 요소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그의 해명을 받아들이는 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가 예술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고 변명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의 마음을 심리학적으로 들여다 보자면, 영화에서 주인공 병수를 제외한 등장인물은 거의가 여성이다. 부인, 딸, 애인, 연인, 집주인까지 모두 여성이다. 예술을 숨 쉬게 만드는 부분이 심리학에서의 여성적인 구조인 ‘아니마’이니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의 내부의 풍부한 여성성이 그가 많은 영화를 창작하는 원천일 것이다. 주로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는 선희라고 생각된다. 그는 선희라는 이름을 영화 '우리 선희'에서도 썼었는데 여기서도 사랑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전 존재를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흔들고, 그의 전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성은 집주인 해옥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그의 전체를 관장한다. 그녀는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모든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고, 그가 가진 모든 파편들의 균형을 맞추고, 파손된 부분을 수리해 주고, 그의 존재 가치까지 변호해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작가를 지탱하는 중심 아니마는 그를 보호해주는 해옥 같은 여장부 스타일의 여성성일지도 모른다.




keyword
이전 11화영화<45년 후>-세사람이 함께 한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