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겹의 매트리스와 20겹의 이불을 쌓아도 느껴지는 이물감, 마음 저 아래에서 뭔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이렇게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동화는 없을 것이다.
이 동화를 어른의 이야기로 바꾸면 영화 ‘45년 후’가 될 것 같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없지만 애완견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노부부가 있다.
10년마다 결혼 기념 파티를 하는데 40주년 때 남편이 아파서 미루었다가 45주년 결혼 기념 파티를 준비하고 있던 노부부에게 어느 날 편지가 날아온다. 50년 전 스위스 알프스에서 등반하다가 추락해서 빙하에 묻힌 남편의 첫사랑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처음에 아내는 결혼 전부터 이미 첫사랑의 존재와 사고 경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남편의 말을 이해하며 관대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 뒤로 점점 평정심을 잃어가며 잠을 못 자고 한밤중에 오래된 물건들을 쌓아둔 다락을 뒤지기 시작하고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보러 직접 스위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파티 준비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낮에 혼자 시내로 외출해서 스위스 비행기를 알아보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결혼했을 거냐는 아내의 질문에 긍정의 대답까지 한다.
달라지는 남편의 태도에 아내도 영향을 받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고 남편이 외출했을 때 다락방에 올라가 첫사랑의 자취를 찾아본다. 수많은 사진과 슬라이드를 보고 둘이 많이 사랑했고, 그녀의 머리색이 갈색이었으며 알프스 등반 당시 임신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그가 결혼 후에 왜 자기와는 함께 사진을 찍지 않았는지, 왜 자기와는 아이를 갖지 않았는지, 그녀와는 알프스 등반도 하면서 왜 자기와는 산책조차 하지 않았는지, 왜 자기의 갈색 머리를 좋아했는지 등의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과 만나기 전인 과거에 만난 사람과,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었지만 실제로는 남편에게 아직까지도 영향을 주는 첫사랑의 존재에 아내는 감정적으로 심하게 흔들린다.
결혼 내내 풍기던 수상한 낌새와 등 뒤에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시선이 어디서 온 것이었는지 깨달은 아내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는다.
부부가 찍은 사진이 거의 없어 파티에서 친구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모아 사진판을 만들어주고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감사연설을 하지만 둘이 춤을 춘 뒤 남편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아내는 차가운 표정으로 손을 뿌리친다.
40겹의 매트 밑에 깔린 완두콩처럼, 빙하 속에 묻힌 유해처럼, 50년 동안 마음속 깊이 감추어둔 기억도 결국 발각된다.
기후 온난화로 빙하 표면의 눈이 녹자 얼음 속의 시체가 20살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억압하고 저 밑에 꼭꼭 눌러놓았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자를 불러낸다. 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대목마다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 남편의 모든 삶에 영향을 주었고 결국 아내는 결혼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자리를 잃었다.
얼마간의 방황 끝에 무의식적인 혼란의 원인이 의식화되어 오히려 남편은 자신이 현재의 아내와 인생을 보낸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지만, 아내가 45년의 기만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해피 엔딩일 수가 없다.
남편은 사고로 여자 친구가 죽고 나서 마음에서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픈 기억을 너무 괴로운 나머지 너무도 억압해서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에 오랫동안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그 압력은 터지기 전의 폭탄과도 같았고 일단 터진 후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대로 이별을 하지 못한 채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매트리스 아래에는 불편한 콩이 늘 깔려 있었다.
유해의 발견으로 무의식의 긴장이 해소되자 남편은 지금의 아내를 선택하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감정은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깝고 사랑과는 달라 보인다.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알 수는 없었던 낌새의 정체를 알고 나자 더 이상 기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내는 파티에서 남편의 손길을 뿌리친다. 아내에게는 만일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남편이 그녀와 자신중 자신을 선택했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자신은 그녀의 대신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결혼은 세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비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