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러브레터>-첫사랑을 깨닫는 순간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

by 윤병옥

1999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첫사랑 영화 중에 ‘러브레터’는 영상도 아름답고, 주인공들도 예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수작이다. 그러나 볼거리에 매혹당해서 의외로 줄거리를 흘려버리기 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다시 보면서 첫사랑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로코는 2년 전 등반에서 조난을 당해 실종된 남자 친구 후지이 이츠키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고베에 있는 그의 부모님 집에 온다. 히로코는 그의 오타루 중학교 시절 앨범을 보다가 그의 옛집 주소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편지를 보낸다. 물론 그는 세상에 없지만, 천국이 있어서 그가 편지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잘 지내나요?”라고 써서 그냥 보내본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답장이 오고, 그녀가 이제는 후지이를 잊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새 남자친구인, 시게루는 누군가가 장난으로 답장을 보냈다고 생각해서 신분을 밝히라고 따진다.

알고 보니, 후지이 이츠키와 동명이인이었던 여학생이 있었고, 히로코가 그녀의 집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둘은 그녀를 만나보기 위해 오타루로 온다. 후지이는 마침 감기로 병원에 가는 바람에 집에 없어서 둘은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히로코는 후지이에게 자신이 아는 후지이는 그녀의 애인인데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편지를 보냈던 것이라는 쪽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고 떠난다.

조금 뒤 병원에서 후지이를 집에 태워다 준 택시 기사는 돌아나가는 길에 히로코와 시게루를 태우는데, 두 여성이 아주 많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한다. 집에 도착한 후지이는 쪽지를 보고 답장을 써서 부치려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가다가 둘을 지나치는데, 히로코가 후지이를 알아보고 불러서 뒤돌아보지만 결국 후지이는 히로코를 보지 못한다.

히로코는 연인 후지이가 자기를 선택한 이유가 그의 첫사랑 후지이와 비슷해서가 아닌가 의심한다.

히로코가 후지이에게 연인 후지이에 대한 과거 이야기를 편지로 들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녀는 성심껏 기억을 되살려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명이인이어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고 함께 도서부장이 되어 도서실에서 일했을 때 그가 모든 신간을 빌려 도서 카드의 첫째 칸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도배했던 이야기, 이름이 같은 바람에 영어 시험 답안지가 바뀌어 기다렸다가 바꾸었는데 답안지 뒤에 그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는 이야기,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데 자기의 얼굴에 종이봉투를 뒤집어 씌우고 도망간 이야기 등을 편지에 써서 보낸다. 그가 대표로 뛸 예정이었던 육상대회를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대회날 기브스를 한 채로 옆에서 같이 뛰다가 넘어진 이야기를 쓰자, 히로코는 그가 뛰었던 학교의 운동장 사진을 보여달라며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보낸다. 사진을 찍으려고 오랜만에 다니던 중학교에 간 후지이는 도서관을 담당했던 옛 선생님을 만나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방문한다. 거기서 과거에 그녀가 장부를 정리할 때 그는 하얀 커튼이 휘날리는 창가에 서서 책을 읽었던 장면을 회상한다. 후배들은 도서카드에서 후지이 이츠키 찾기 놀이가 유행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87장을 찾은 사람이 1등이라고. 그를 기억하냐고 묻자 선생님은 그가 2년 전에 조난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시게루는 아직도 후지이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를 데리고 그가 조난된 산이 보이는 산장으로 간다. 맑은 아침 해가 뜰 때 히로코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시게루는 그녀의 등을 떠밀며 멀리 보이는 저 산이 후지이가 있는 산이라고 하며 가까이 가서 인사하라고 한다. 그쪽으로 다가간 히로코는 온 힘을 다해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라고 외치고 그 말은 메아리쳐서 다시 온다. 그녀는 쌓여있던 답답함과 섭섭함과 죄책감을 모두 쏟아낸다.

감기가 악화되어 폐렴이 된 후지이가 고열로 쓰러지고, 할아버지가 병원까지 업고 뛰어 살려낸다. 퇴원하자마자 후지이는 히로코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의 아버지도 감기가 악화되어 자신이 중3이 될 무렵 돌아가셨다고. 그런데 상중에 갑자기 후지이가 찾아와 자신이 도서관에 반납하지 못한 책이 있다며 대신 반납해달라고 전해주었다고 한다. 학교에 가보니 후지이는 인사도 못하고 급하게 전학을 갔다고 한다...

얼마 후 소포가 왔는데 지금까지 후지이가 히로코에게 보낸 모든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히로코는 이 이야기들은 모두 후지이의 추억이니 당사자에게 다시 돌려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도서 카드에 쓴 이름은 아마도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이었을 거라고 한다.

이때 후배 도서반 학생들이 찾아오고 책을 한 권 전해주는데, 바로 그가 전학 가기 전 그녀의 집에 와서 주었던 책이다. 도서카드를 보라고 해서 보니 역시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이 첫 칸에 적혀있다. 뒤를 뒤집어 보니 그녀의 중학교 때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있었다. 앞면에는 수취인의 이름이, 뒷면에는 보낸이의 마음이 들어있는 엽서 형태이다.

러브레터였다. 첫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사람과 사귀고 헤어진다. 세월이 흐르면 어떤 경우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중에 첫 번째 사랑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때는 그 감정이 사랑인 줄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하는 나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성인이 되어서 조건을 따지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는 달리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으로 좋아한다. 즉, 무의식적인 끌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적으로 따지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 사람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의식적인 성향은 평생 바뀌지 않는다. 분석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그 사람의 반대 성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부분인 아니마나 아니무스와 비슷한 이미지의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있다. 나이가 들면 페르소나가 이것을 제지하지만 10대 시절에는 이런 감정에 거침없고 솔직하다. 그래서 보통 첫사랑은 십대에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첫사랑의 이미지는 마음의 원형이어서 아무리 억압해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실존 인물도 첫사랑의 이미지와 싸워서 이길수 없다.

후지이는 중학교 시절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을 좋아했다. 마음을 고백한 적도 없고 전학을 가게 되어 헤어지게 되지만 그 감정을 내내 가지고 있다가 그녀와 이미지가 너무나 비슷한 여성인 히로코를 만나자마자 그녀와 사귀자고 한다. 히로코는 그의 첫사랑의 역사를 몰랐고, 비극적인 사고로 남자친구를 잃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다른 남자를 사귀는 데에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인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편지가 거듭되고, 그녀의 사진을 보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히로코는 남자친구의 첫사랑이 후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그녀는 세상을 떠난 그와 제대로 이별을 할 수 있게 된다.

여학생 후지이는 또래의 친구들은 다들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는데도, 자신은 이성에 별 관심이 없는 다소 무심한 성격이다. 동명이인인 남학생 후지이와 이름 때문에 얽히는 게 짜증이 날 뿐이었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된 어느 날, 히로코라는 여성에게 편지를 받고 중학교 시절 후지이와의 추억을 모두 꺼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도서카드에 썼던 이름이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이라는 것과 그가 그녀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이 아니라 자신도 그와 도서실에 같이 있었던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즘도 CF나 코미디에 많이 등장하는 하얀 커튼이 휘날리는 창가에 서서 책을 보고 있는 미소년 장면이 바로 후지이의 마음에 저장된 남학생 후지이의 모습이다. 다소 둔감한 후지이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그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한 러브레터를 받고 그제서야 자신도 그소년을 좋아했음을 깨닫는다. 그도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후지이라는 여성의 자아는 매우 방어적이다. 관객들 누구라도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학생 후지이가 여학생 후지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녀만 모른 척, 아닌 척한다.

영화에서 1인 2역으로 나온 후지이와 히로코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같은 사람의 양면이다. 의식적으로 무심하고 중성적인 후지이가 자아라면, 억압된 그림자는 히로코의 특성인 세심하고 여성적인 부분이다. 민감하고 세심한 그림자인 히로코만이 그녀 마음속 남성적인 아니마인 후지이를 알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도 후지이는 히로코를 못 보지만 히로코는 뒤돌아 본 후지이를 알아본다. 즉, 무의식만의식에 개입할 수 있다. 히로코는 후지이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키기 위해, 편지라는 수단으로 과거를 꺼내서 돌아보고 자각하게 만든다. 소녀는 무의식속의 남성적인 부분과 억압한 여성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고 통합해야 성숙한 여성이 될수 있다.

결국 이영화는 방어적이고 미성숙한 여성 후지이가 마음안에 있는 이성의 이미지와 여성성을 받아들이며 성숙해가는 성장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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