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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an 22. 2024

마이 디어 에너미(My Dear Enemy)

남편의 생일상을 차리며

    

남편은 전형적인 이과형이다.

나도 전공은 이과였지만 평생 문과 쪽에 고개를 들이밀고 살았던 것에 비해서 그는 뼛속까지 이과생, 그것도 순수과학이 아니라 응용학문인 공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세상에 적용하지 못하는 모든 학문을 쓸모없는 분야로 치부한다.

내가 이과 학부를 졸업하고 문과 쪽 대학원을 다닐 때도 거기를 졸업하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냐고 계속 질문했던 사람이다.

그는 미국에서 싱글로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일을 했기 때문에 그때 만들어진 자신의 생활 스타일이 공고해서 결혼 초에 내가 그에게 끼칠수 있는 영향은 미미했다. 개성이 강해서 절대로 남의 말은 듣지 않았지만 다행히 나에게도 그의 본가 대소사 의무 이외에 강요하는 것은 없었다.

그의 집안은 유교적인 관습을 중시하는 분위기였고 그도 집안의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순응하지 못하는 내가 그문화에 억지로 힘들게 맞추어서 지내려니 내내 힘이 들었었다.

그러면서 우울하기도 하고, 남편을 미워하기도하고, 오랫동안 탈출을 꿈꾸며 지냈던 것 같다. 40대 까지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늦더라도 꼭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건강에 문제도 생기고 아들들이 크면서 청년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거기서 남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도 어렸을 때는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연민이 생겼다. 나보다 별로 나이도 많지 않은데 그에게만 어른 노릇을 하라고 강요했나 하생각도 들었다.

남편이 나의 보호자도 아니고 나도 성인인데 왜 부모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남편에게도 이것저것을 바라는지 반성했다. 부부는 서로가 동등한 파트너일 뿐이고 내가 에너지와 용기가 부족해서 못했을 뿐, 남편이 나를 키워줄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남편도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배우자를 만났다면 재테크도 잘해서 지금보다는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50대에 들어서면서 남편의 장점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나와는 달리 어떤 결정을 하면 빨리 행동에 옮긴다. 나는 생각만 오래 하고 결국 안 하는  투성이여서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만났다면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이다.

또 책만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간접 경험만 하고 살았을 나를 일으켜 여기저기 다니며 실제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운동이라고는 안 하는 나를 어떻게든 데리고 다니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을 함께 나누었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니 돈을 많이 벌어온 적은 없었지만 돈 때문에 크게 걱정시킨 적도 없었다. 나는 저질 체력이라 만일 직장에 오래 다녔다면 건강도 육아도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어서 나의 장기인 멍하니 공상하는 일과 책 읽는 일과 영화 볼 수 있는  게으름을 피울  있었다.

     

강산이 변하고 그도 퇴직을 하니 빈말이라도 이제라도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내가 집안일을 내버려 두고 글 쓰겠다고 카페로 뛰쳐 나가도 열심히 집안일을 도와주려는 노력이 보인다. 젊었을 때는 어림 없던 일이다. 

그토록 쓸데없다고 비난하던 미술관, 박물관 같은 문화적인 행사도 같이 다니 하고 거기에 대한 나의 잘난척이 섞인 해석도 참고 들어준다.

머리숱이 부쩍 없어진 남편을 보면 이젠 미안한 마음이 들고, 둘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나란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양가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나니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미래가 뻔히 보인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질병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우리 중 하나는 먼저 떠날 것이다. 그 부재를 미리 상상하며,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남은 시간 동안 해주고 싶다.

     

남편의 생일을 맞아 그의 입맛에 맞춰 정성껏 아침 밥상을 차렸다. 갈비찜과 남편이 좋아하는 해산물 종류를 몇 가지 올렸다. 농어 스테이크, 굴전, 새우찜을 미역국과 함께 올리니 남편이 아닌척해도 좋아하는 티가 난다. 

영화 ‘디센던트’의 조지 클루니 식의 대사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원수,

나의 파트너,

나의 친구

생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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