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
대대적인 정리와 청소 끝에 손녀를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며느리가 디지털 사진첩을 만들어서 많은 사진들과 동영상을 올린 덕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매일 그것들을 봐서 그런지 공항에서 처음 본 손녀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기를 처음 안으니 달큼한 젖 냄새와 새 생명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 아기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 보호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깨끗이 치워서 비워진 공간에 순식간에 아기의 물건들이 가득 찼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우리 때처럼 바닥에 요를 깔고 재우지 않고 아기 침대와 기저귀 갈이대를 놓았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사용해 보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아기를 들여다보기도 편하고 위생적으로 기저귀를 갈고 처리하기도 편했다.
스테인리스 솥에 젖병을 삶아 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젖병 세척기도 있었다. 이것도 그냥 솔로 닦아서 삶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써보니 막상 아기 돌보느라 정신없는 엄마가 젖병 닦을 시간도 없을 텐데 있으니 편리했다. 가장 놀란 기기는 우유 제조기였다. 마치 커피 메이커같이 생긴 것에 윗부분에는 분유가 들어있고 뒤에는 물통이 들어있어서 아기가 먹기 좋은 온도로 물을 데워서 한방에 우유를 제조했다. 이것도 아기가 배고프다고 난리일 때 아기를 한 손으로 안고도 나머지 손으로 스위치만 누르면 우유를 순식간에 만들어주니 정말 편리했다. 그 밖에도 아기가 좋아하는 전동 모빌도 있고 새로운 육아기구들이 정말 많다.
집에 들어오면 집안 전체에서 우유 냄새가 나고 육아 기구들이 가득 찬 거실이 보인다. 정신없지만 정말 즐거운 대소동이다. 이게 얼마 만에 경험하는 황홀한 냄새이고 활기찬 울음소리인지 모르겠다. 온 가족이 손녀가 밤에 우유 달라고 우는 바람에 깨는데, 이렇게 아무 때나 배고프다고 외칠 수 있는 존재가 순수해서 놀란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젊을 때 우리 아이들 낳고 키울 때의 기억을 불러온다. 나는 아들 연년생을 키워서 숨 쉴 틈도 없었고 형에게도 아우에게도 따로 집중할 수 없었다. 너무 빨리 아우를 본 형에게도 미안하고 아기 때 많이 돌보지 못한 동생에게도 미안했다. 물론 나도 엄청 고생을 했다. 2년 정도를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식사를 할 겨를도 없어서 점심을 굶었다. 에너지가 부족해서 커피믹스를 먹으며 버텼다. 그때 사상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었다. 그 아이가 커서 아빠가 되었고 나는 할머니가 된 것이다. 아들은 신세대라 열심히 육아를 돕는다. 우유도 제일 잘 먹이고 트림도 잘 시킨다. 이것도 옛날에 밤에 아이가 울어도 안 깨던 남편이 다시 얄미워지는 계기가 된다. 하하.
신생아 때 초보 부모로 외할머니와 쩔쩔매며 밤잠 설친 아들 부부를, 오랜만에 바람 쐬고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내보낸다. 나도 이제는 허리도 어깨도 손목도 부실하지만, 손녀가 더 크면 힘들어서 못 할지도 모르니 지금 열심히 안아주고 우유 먹이려 한다.
아기가 잠투정할 때 가장 좋은 곳은 할머니의 품이다. 외할머니 품에서도 잘 잤다고 하고, 내 품에서도 잠이 잘 든다. 큰 아들도 조카를 예뻐해서 아기를 안고 재우려 하지만 아기가 호응을 안 한다. 내가 아기를 배 속에 있을 때처럼 내 팔을 두르고 꼭 품어주면, 놀라지 않고 쌕쌕 숨소리를 내며 예쁘게 잠든다. 잠든 아기 얼굴을 바라보면 이 아이가 클 때까지 내가 건강하게 잘 버텨야겠다는 비장한 생각까지 든다. 돌보는 가족을 완전히 믿고 자신의 전 존재를 편안히 맡긴 아기를 보면 책임감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생물이 진화할 때 자신이 생존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을 테니, 아기가 돌보는 사람을 어떻게 훈련시키는지가 보인다. 작은 생명체는 먹어야 성장하니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늦어지면 치명적이다. 따라서 우유가 늦으면 아기가 호된 경고를 날린다. 집안이 떠나갈 듯이 우는데, 그 우는 정도가 하도 격렬해서 혹시 아기가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며 빨리 먹을 것을 준비하게 된다.
이것이 채찍이라면 당근도 가끔씩 준다. 우유를 먹이는 사람을 그윽하게 쳐다봐서 반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기분 좋을 때는 치명적인 미소도 날린다.
이제 얼마 후면 옹알이도 할 텐데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기와 눈 맞추고 이성의 대화가 아닌 순수한 감성의 대화를 할 날을 학수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