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당하면 아프고 힘든 게 당연해

정서적, 생계적 사고 환자의 자기 인식

by 일단



전혀, 괜찮지가 않아.
현타가 오는 시점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구조조정에 대한 말을 들은 첫날에 나는 꽤 쌩쌩했다. 이직을 준비하는 동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우선 생계는 유지하면서 지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에게 맞지 않는 업무를 지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으니 이렇게 잠시 쉼표를 주고 삶의 방향성을 다시금 정리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칭찬일기와 감사일기도 쓰고 있었고, 스트레스 해소와 체력증진을 위해서 달리기도 하고 있었다. 직장인들을 위한 심리 상담을 통해서 나의 내면의 상처를 다시 돌아보는 경험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생각보다 내가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착각인 듯했다. 구조조정에 대한 공지가 있던 다음날부터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업무 종료일까지 재택근무와 오피스 출근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상황에 출근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힘든 일이라 재택을 선택했다. 출근해야 할 시간에 집에 머물면서, 조금씩 현실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어제의 긍정적이던 나는 아직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았다. 전사타운홀에서 구조조정 이야기를 들은 후 망연자실해 보였던 동료의 멍-한 표정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초조하고 두려움이 생겼다.


무기력하게 방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가 복잡해져서 방 안에서 유튜브 채널을 뒤져보기만 했다. 희망퇴직을 할 것이라면 희망퇴직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공지가 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 어떤 액션을 취할 수 없었다.


생존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을 그만두게 될 수 있다는 불안함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나의 생계와 관련된 직장을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만두게 되는 경험은, 타격감이 큰 일이었다. 구직 사이트를 뒤지면서 기존에 하고 있던 교육 운영 관련 회사와 직무를 뒤져보기도 했다. 기존 직무에 대한 회의감이나 스트레스가 있던 상황에서 다시 회사에 이직을 한들 이 혼란스러움이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직을 한다 해도, 그 회사에서도 끝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생계가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다는 생계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나가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불안감과 위기의식에 직면했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경제적인 활동을 하실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버는 돈으로 가계에 조금씩 보태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엄마는 자주 아프시고, 몇 년 전에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병원비가 없어서 울며 힘들었던 기억이 깊게 각인이 되어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프시면 삼촌, 이모, 엄마가 돌봐드리고, 병원비와 치료비를 내는 상황을 지켜봐 온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가 아프시면 돌봐드리고 생활적으로도 도움을 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생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상황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니 여러 가지로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단순히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여기에서만 생각이 머무르지 않았다.



직장은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
매슬로우 욕구위계

매슬로우라는 심리학자가 제시한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5단계의 기본욕구가 있다. 가장 첫 번째가 생리적 욕구다. 의식주와 수면과 같은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들을 가장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가면 두 번째로 안전의 욕구를 추구한다. 신체적, 감정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을 추구하려는 욕구다. 복지, 연금, 직업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욕구가 여기에 포함된다.


세 번째는 사회적 욕구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소속감, 우정, 사랑 등을 원하게 되는 욕구를 말한다. 네 번째는 자존의 욕구로 성취감, 능력, 자신감을 통한 자기 존중을 추구하는 욕구다.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잠재력을 역량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


희망퇴직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1단계 욕구와 2단계 욕구를 추구하고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긴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당장 나의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고,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이 되니 덜컥 겁부터 났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위협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불안한 상황과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게 다가왔다. 마음이 불안하고, 밥맛도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았다.



힘든 게 당연해요. 우리는 사고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힘든 건 당연한 거예요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실업자가 된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니, 아직도 멍한 상태인지 몰랐다. 근무종료일까지 재택근무를 하다가 사용하고 있던 노트북과 회사물품을 반납하고 짐정리를 하기 위해 회사에 나왔다. 퇴사를 위한 반납절차를 마무리하는 틈틈이 동료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사타운홀에서 구조조정 공지를 했던 첫날은 괜찮았는데 그다음 날에 타격감과 함께 힘든 감정이 몰려왔다고 하니, 어떤 동료분은 그 주 주중에는 괜찮다가 주말이 되니까 자각이 되기도 했고, 다른 동료분은 그 주에는 괜찮다가 실제 퇴사를 해야 하는 주가 시작되고 나서 현실자각이 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한분이 이런 말을 했다.


“힘든 게 당연해요. 우리는 사고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 그렇네. 우리는 사고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힘든 게 당연하구나.’ 당장 내가 원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었고,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것처럼 퇴사를 하게 됐다. 마치 지나가다가 물리적으로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사고를 당한 사람이 “내가 왜 이렇게 힘들지?”하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


아, 내가 힘든 게 당연한 거구나
정서적, 생계적 사고 환자


아프고 충격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하고 받아들일 텐데 한순간 직장을 잃게 된 것이 정신적으로 사고를 당한 것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생계적인 부분까지 위협을 받은 상황이다. 나는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둔감한 편이다.


힘들면 힘들면 되고, 아프면 아프면 되는데 내가 왜 이런 것인지 그것 조차 머리를 생각하려 하니까, 나의 상황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그 정도만 힘든 게 당연하지.”하고 말을 해주면, ‘아, 이런 상황에서 힘든 게 당연한 거구나.’하고 그제야 깨닫는다.


사고를 당한 것치고 이 정도면 잘 견뎌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플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니, 지금 이 상황을 쉽사리 견뎌내지 못하는 내 자신을 다그치지는 않고 싶었다. “힘든 게 당연해요. 우리는 사고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동료분의 한 마디가 지금의 나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고, 지금의 힘듦을 덤덤히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상처와 충격을 다스리고 회복하기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쉬어 주어야 한다. 사고로 얻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에 사람마다 시간도 다르게 걸리고 필요한 치료법도 사람마다 다를 테다. 지금은 나를 평온하게 돌보아주고 일으켜 세워주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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