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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5.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서론

저는 시의 '대중화'를 꿈꾸지 않습니다. 시 읽가 우리 문화의 주류가 되기를 거의 기대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서점 매대에서 시집이 동나도록 팔려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그 계기는 시 자체와 큰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때 '시 자체'의 범주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시의 내용, 미적 완성도, 음미하거나 숙고할 만한 파격성 등이 직접 작용해서 어떤 시집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린 사례는 드물다는 얘기입니다.


94년도 출간된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그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 이 시집 속 최영미의 시는 삶의 모순을 잡아내어 효율적이고 강력한 언술로 그것을 전하는 시적 덕목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허풍스럽게 아무 말이나 갖다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말 저건 좋은 시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시집이 육십만 부에 이르는 이례적인 판매고를 올리려면 그걸론 역부족입니다. 사회가 먼저 시집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김용택이 단 발문을 통해 당시 문화적 흐름이 어떻게 최영미의 시와 조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대중은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도시 여자'의 '감당하기 힘든'(그의 말뜻에서 응큼떨지 않는다거나 감당하기 힘들다는 건 대강 섹스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는 뜻입니다) 목소리를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386세대의 어딘가 환멸 어린 운동권 후일담이 곁들여지면 파급력은 더 커집니다.


작품의 성공 요인을 분석할 때 고려해야 할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종이책은 공예품이기도 합니다. 외관의 매력, 상징성, 선물 가치, 소유자의 체면을 이루는 패션적 기능 등은 책과 뗄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실제로 책을 읽거나 내용을 파악할 맘이 없어도 얼마든지 책을 살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전국 책장에 꽂힌 <총, 균, 쇠>나 <사피엔스> 중 상당수는 두 번 이상 펼쳐진 적이 없을 겁니다. 또 90년대엔 유튜브도 없었고요(중요). 더해서, 최영미의 시가 포스트모던한 '수작'을 덜 부리는 것처럼 보인 점도 판매에 영향을 줬을지 모릅니다. 실상은 그 반대에 조금 더 가깝고, 현대성이니 심지어 미래성이니 하는 것은 시의 겉모습이 얼마나 낯익은가 혹은 얼마나 '순하게' 보이는가와 큰 상관이 없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생깁니다. 앞서 나열한 요소들을 시에서 배제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 사회적 컨텍스트를 포함한 전체를 시라 부르고, 그것까지를 시의 힘을 이루는 일부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시의 좋고 나쁨을 상품으로서의 좋고 나쁨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가 시의 성취를 폄하하는 일은 아닙니다.


89년도,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서른에 뇌졸중으로 죽었습니다. 요절한 천재 환상은 홍보의 좋은 재료입니다. 실제로 좋은 시를 썼으므로 문단의 지지도 따랐습니다. 아울러 일부 대표작(가령 '빈 집')은 비교적 이입하기 쉬운 서정성을 지녔기에 독자가 접근하기 좋았습니다. 기억하기로 기형도의 저 유고작은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중 가장 많이 팔린 시집입니다.


한편 보다 최근의 문학적 혁명(가능한 한 중립적인 의미에서)을 이끈 작품으로 하상욱의 <서울시>가 있습니다. 전국의 문예창작학 전공자들은 아마 하상욱에 대해 할 말이 조금씩 있을 겁니다. 저의 경우, <입 속의 검은 잎>에 대해서는 마케팅 포인트가 어떻든 좋은 시가 여럿 실린 시집으로, <서울시>에 대해서는 상업적 성공이나 많은 독자의 호응과 별개로 내용상 고평가할 것 없는, 그러나 독특한 형식적 기획을 갖춘 역작으로 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서울시>는 과잉동일시의 한 전형입니다. 마치 시 자체가 이미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개인 SNS에 인용되고 발췌되는 과정에 조각난 듯한 형태를 띱니다. 각 편은 짧고, 요약적이고, 편안한 유머코드를 통해 편안한 충격을 제공합니다. 시 말미에 제목을 밝힘으로써 독자가 앞서 읽은 내용을 맥락 안에서 다시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 이는 밈을 소비하는 대중의 독해 흐름에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기형도에 대해서는? 이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입니다. 확실한 건, 하상욱의 작전을 알아볼 만한 의지와 분별력이 있는 독자라면 기형도의 시로부터는 작전을 넘어서는 낯선 의지, 낯선 분별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겐 믿음이 있는 셈입니다. 몇 부가 팔렸는가를 배제하고도 얼마든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근거들이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잠깐 미술 얘기를 하겠습니다. 마네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한화 기준 약 400억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마네의 <봄>이 약 700억에 팔렸고요. 그러나 둘 사이에 정말 300억 원어치 격차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을 겁니다. 제 소견으로 <봄>은 먼저 팔린 자화상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채색법과 윤곽의 처리에서 (서구 미술 타임라인에서의) 현대성이 엿보입니다. 색감이 무척 좋으며 시선 유도도 잘 됩니다. 즉 전시에 유용합니다. 그럼 게티 재단도 같은 생각으로 거금을 내놓았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미술에 대한 제 안목은 기껏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므로, 아마 재단에선 훨씬 더 폭 넓고 전문적인 저울질 후에 판단했을 겁니다. 어쩌면 마네라는 이름표의 후광에 눈 딱 감고 투기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라는 현실 앞에서 오늘날 호응을 얻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예술품의 금액상 우열뿐만 아니라 미적 우열 또한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나름의 식견을 갖춘 현대인은 자주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술사에선 임의의 취향들이 득세하고 사그라들 뿐, 작품의 수준이 높고 낮음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며 그런 시도는 시대착오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이라고요. 어떤 회화 작품이 열등하다는 말을 편히 꺼내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일 겁니다. 미술계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 혈기 있고 예민한 전공자, 드물게는 면이 퍽 두꺼운 전문가.


예술계는 변화합니다. 유행이 바뀌고, 작품의 성격과 가격이 바뀌고, 유통처도 바뀌고, 수상자도 바뀌고, 티비에 나오는 얼굴들도 바뀌고, 창작자들은 자꾸 자신이 바뀌었다거나 자신이 바꾸었다고 말하고, 하여튼 바람 잘 날 없어 보입니다. 작품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미적 성취의 원리를 찾겠다는 의지 따위 진압될 만도 합니다. 하물며 1920년대의 시를 이제 와서 진지하게 읽는다니요? 그걸 어제 쓰인 시와 나란히 놓고 읽는다거나, 어느 쪽이 왜 좋은지 따져 보는 일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이미 그로부터 너무 많은 변혁을 거친 환경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지양하고 싶습니다. 무기력과 수동성으로는 우리가 정직한 감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정직함이 왜 필요합니까? 면밀한 읽기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뭐가 좋습니까? 우리가 맨날 읽던 것을 또 읽지 않아도 됩니다.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 좌절된 사랑에 관한 하이네의 서술과 데스노스의 서술은 그 나물에 그 밥인 듯 느껴집니다. 즉 읽을 준비가 된 데까지만 읽힙니다.


반면 글을 제대로 읽을 때 우리는 생생하게 다각화한 세계에 던져집니다. 뜻밖에 우리 삶에 매우 드문 사건, 만남이라는 사건이 그때 비로소 발생합니다. 만남은 '나'를 벗어나는, '나'를 넘쳐나는, '나'를 이동시키는 경험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게도) 우리에겐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늘 유지해온 틀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는 그것에 맞서는 사람의 전술입니다.


학창시절에 배운 희곡 <원고지>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침 신문에 묘사된 범죄 사실은 우리 마음을 쉽게 울리지 못합니다. 기사는 뇌를 그저 지나칩니다. 글은 본래의 충격량을 잃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침 신문에 실리는 '오늘의 시'도 그렇습니다. 연재를 통해 저는 시에 잠재된 충격량이 최대한 실현되게끔 돕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는 일은 목표에서 멉니다. 최우선 목표는 좋은 시의 소개입니다.


각 시에 대한 저의 해제는 반드시 좁고 독단적일 것입니다. 약간은 신뢰할 만한 전공자의 의견조차 못 됩니다. 겸양을 떠는 게 아니라,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설명드릴 내용 대부분을 저는 강의실에서 직접 배우지 않았습니다. 떠올리고, 탐색하고, 접합하여 만든 일종의 독해기계가 제게 있을 따름입니다. 그건 분명 사적인 기계입니다. 거기에 텍스트를 넣고 돌리면 영 초라하고 엉뚱한 게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게 진짜 대단한 시니까 저를 믿으세요." 같은 말을 해도 강제성은 없습니다.


단지 저는 시를 읽는 경험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길 바랍니다. 온전하고 정당하게 읽힐 때, 시가 언뜻 빛나는 순간, 세계로 사고가 전염되는 것 같은 그 신비를 함께 겪고 싶습니다. 맨 앞에서 "시의 대중화를 꿈꾸지 않는다"던 말이 무색하게도, 정말입니다.


물론 무시 못할 의문점이 많습니다. 시시콜콜 따지는 태도는 시 읽기에서도 요긴하므로, 따져보겠습니다. 우선 시를 읽음으로써 '나'를 이탈하는 확장적 경험("만남")을 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의심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이해한 것 외에는 이해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성공적으로 입력되었다면 그건 이미 이해된 것일 뿐 이해가 질적으로 다른 이해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나'를 뒤흔들 새로운 자극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 가능한 형태로 치환해야 합니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강화되거나 재발견될 수밖에 없고, '나'가 정말 새로운 이해를 통해 성장했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걸 알 길이 없습니다.


시를 비평하는 일의 효용이나 정당함이 의심될 여지도 충분합니다. 앞에서 저는 좋은 성취를 이룬 시와 그렇지 않은 시가 유별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시에 점수를 매겨 우열을 가리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콘테스트처럼요. 게다가 우리의 분별력이 더 예리해질수록 만점에 매우 가까운 시들 중에서도 나은 것(99.972점)과 덜한 것(99.35점)을 나누게 될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시는 '궁극의 시'에 이르는 노정에 있는 미결품에 불과한 셈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의 시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리지 않을 이유가 어딨습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온갖 다른 모양의 시들로부터 느끼는 감동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시의 독특한 점은, 그것이 일단 시적으로 '좋게' 되고 나면 그 안에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완전함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만점짜리 환상을 만드는 게 시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역시 우열은 없는 겁니까? 아니면 우열은 있되 진짜 문제가 아닌 겁니까? 딜레마에 대해 저 또한 고민을 거듭하는 처지입니다.


다만 한 가지 힘찬 가설이 있습니다. 시란, 좋거나 나쁠 수 있는 게 아니라, 시적인 것과 시가 아닌 것들 가운데 시적인 것만을 가리키려고 하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 보면, 좋은 시가 왜 좋은지를 고민하는 일은 그 시적인 것(효과)의 발생을 추적하는 활동으로서 의의를 얻습니다.


항간에 "힙합은 자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닐 리가 없습니다. 조각, 성악, 회화, 발레, 시와 소설도 자유 맞습니다. 어쩌면 수학, 우주과학, 역사학도 자유입니다. 즉 넓은 의미에서 기예(techne)는 자유인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특정한 매개와 표현 형식을 통해 사유하는 이가 세계에 대해 발휘하는 영향력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재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생각도 말도 '투명하게'는 못합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또 표현될 때 수없이 얼룩집니다. 그걸 못 막습니다. 인간적 자유란 그런 겁니다. 자유로움은 끝없이 확장하는 능력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불능성과 맺는 계약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댄서들은 때로 중력이 없는 세계로 가고 싶을 겁니다. 일정한 규모와 물리적 한계를 지닌 몸 때문에 제한되는 무한한 표현을 좇아 유령 같은 게 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춤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몸 때문에, 몸 안에서, 몸으로부터 성립합니다. 댄서는 여러 힘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이용하거나, 그것이 없다는 듯 움직입니다. 실은 그 전부를 합니다. 그리고 전부를 무척 잘하려고 애씁니다.


다른 분야에도 이 틀을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역사학은 왜 그토록 멋진 학문입니까? 역사학은 인간이 사실상 알 수 없는 것을 이러저러하게 얼룩진 형태로 알아가는 활동입니다. 특히 멋진 건 그 과정에서 인간성 자체의 면면이 밝혀진다는 점입니다. 역사를 탐구하는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곧 자기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는 자유입니다. 시의 표현이 자유롭다면 그건 시가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읽는 이를 어떤 매혹적인 자기 이해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합니다. 죽 늘어선 말이 그냥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에게 설득되어 있는 말들이 시가 됩니다. 요컨대 시는 자유의 절묘한 전개입니다.


시를 읽어서 좋은 게 뭐야? 시를 써서 좋을 건 또 뭐야?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가끔 합니다. 그런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때도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할 만큼 시에 관심을 둔 사람은 보통 이미 나름의 이득을 시로부터 취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자신에게서 질문 받을 때가 더 많고, 그때 이 질문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신에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자신에겐 더 철저하게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궁리를 해봤습니다. 적절한 기대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읽으면, 시는 재미있습니다. 시는 사고가 유연해지게끔 돕습니다. 시는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를 더 많이 접하고 시를 더 알려고 할수록, 시와 함께 어딘가 더 멀고 더 좋은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이렇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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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군 커뮤니티에서 "좋은 시는 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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