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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7.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1

카툴루스와 사포

문자 예술은 무척 오래됐습니다. 추측하건대 문자 발생과 함께 문자 예술도 곧장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실상은 예술 개념이 정립되던 도중 오랫동안 문자 기반의 예술, 그 중에서도 시는 예술에 반쯤만 걸쳐 있었습니다. 물리적 실체가 아닌 '의미'로 존재하는 장르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논리이기는 합니다. 돌을 깎았든, 파피루스에 잉크를 먹였든, 작품을 알아보게 하는 물질이 거기에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회화의 위상도 의문스러워집니다. 엄밀히 회화는 일종의 문자입니다. 최소한 그것은 상형문자이지요. 일례로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은 이런 경계의 모호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무튼, 고전 시대의 예술관 때문인지 시는 형식상 비독립적으로 다루어지곤 했습니다. 시는 노래와 연극 등 공연 예술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엔 시가 지금과 다른 지평에서 창작되었기 때문에 시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추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걸 마주치더라도 뚜렷한 지표를 찾아내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시공간을 가로질러 대화의 창을 열어주는 고마운 존재, 번역가들이 있습니다. 유물이나 다름없는 시의 외피 아래 여전히 뛰는 맥박을 짚을 수 있는 건 그 덕분입니다. 이제 이천 년을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Odi et amo. 

Quare id faciam fortasse requiris.

Nescio, sed fieri sentio et excrucior.



카툴루스 85번, 또는 첫 행을 따서 'Odi et amo'로 불리는, 기원전 1세기의 시입니다. 짧고 알기 쉬운 내용입니다. 원어는 라틴어입니다. 유명한 시인 만큼 영역본이 많고 중역도 많습니다. 여기서는 따로 번역을 채택하지 않고 일반적인 관점에 따라 해석하겠습니다.



나는 미워하면서 사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으리라.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고 그것에 고통받는다.



이 시를 처음 읽던 때 느낀 잔잔한 충격이 다시 떠오릅니다. 카툴루스는 고대 로마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통찰은 고리타분하지 않습니다. 이 시에는 현대시에도 꾸준히 적용되는 시의 3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물론 시의 3요소 따윈 없고, 제가 편의상 적당히 이름 붙인 것입니다. 인식, 증상, 해석이 그것입니다.


첫 단계에서는 주로 모순(irony)이 인식됩니다. 수많은 문학 이론이 문학성의 정수에 이르는 교두보로 모순을 말합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보기 싫다며 떠나는 사람 앞에 꽃을 깔겠다고 말합니다. 그게 어떤 심리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삼 충격적일 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의 뒤틀림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단순하고 자명한 법칙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떠날 때 잘 가라며 꽃을 뿌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사랑하면 그럴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논리를 미끄러트립니다. '진달래꽃'의 화자는 자기 행동의 모순을 인식하며 시를 출발시킵니다.


카툴루스의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흔히 '애증'으로 일컫는 혼란한 감정에 노출됩니다. 그런데 내가 애증하는 대상을 떠올리는 일이, 내가 사랑만 하거나 증오만 하는 대상을 떠올리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어떤 것이든 대개 그것을 깊이 사랑하면 그쪽에서 자기를 적당히 증오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삶의 슬픈 진실 중 하나지요. 이렇듯 시는 '모순인 진실'을 포착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자문자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면서 미워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몰라." 이것이 증상입니다.


증상은 인식에 따른 일련의 반응 기제입니다. 강박, 부정, 섬망, 환원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시 쓰기는 하나의 증상을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적실한 증상과 그에 맞는 장치들을 상상하는 작자의 솜씨가 시적 주체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잠시 '진달래꽃'에 돌아가겠습니다. 시의 화자는 자신을 '꽃'에 대입합니다. "사뿐히 즈려밟으라"는 요청은 실은 자신을 밟아달라는 말입니다. 이때 증상은 도취에 가깝습니다. 자기파괴적인 사랑에 몰입해 그는 이기적인 판단을 멈춥니다. 그런 자신을 은유로써 객관화하며 그는 몰래 기뻐합니다. 카툴루스 시의 경우, "모른다"는 말은 앎의 실패가 아닌 앎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입니다. 주체의 모름이 애증을 생생하게 완성합니다. 나아가서 모름은 주체의 주체성을 이루는 핵이 됩니다.


해석은 특히 절묘합니다. 해석은 통합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얼마든지 분열적일 수 있습니다. 또 해석은 도약적이거나 포괄적인 한편 자폐적일 수도 있습니다. 해석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해석처럼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주체가 때로 진실하기 위해 딴청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시 속에선 반드시 한 세계가 해석되는 중입니다. 해석은 시 속에서 시가 자기 자신을 읽게끔 마련되어 있는 여백입니다. 그곳이 독자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시를 감상할 땐 시에 이상한 루프백 회로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회로를 통해 시는, 불과 몇 마디 말의 틈새로 어떤 전체성(wholeness)을 엿보는 듯한 특유의 미적 쾌감을 제공합니다.


시의 마지막 행을 봅니다.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고 그것에 고통받는다." 이 문장으로 인해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돌아봅니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무슨 원리에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하게 느꼈던 '그것'이 되살아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것'이 있는 세계에 살게 됩니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적 판본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앎의 장막을 찢고 다가오는, 오직 느낌뿐인 세계, 그곳의 고통은 또 얼마나 생생하겠습니까? 이해된 고통은 차라리 낫습니다. 이해를 불허하는 고통은 인간의 지적인 방어기제를 즉시 뚫습니다. 이것이 이천여 년 된 카툴루스의 시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제 카툴루스에서 다섯 세기를 더 거슬러 갑니다. 그리스의 전설적인 시인 사포가 살던 시대입니다. 아쉽게도 사포의 시는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그나마 남은 것도 상태가 안 좋습니다. 지금 다룰 사포 16번('fragment 16')도 여러 행이 지워졌습니다. 찾아 보니 최근에 문맥과 시적 완성도를 고려해 윤색된 번역을 최영미 시인이 소개했습니다. (본인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표현을 낱낱이 분석해야 하는 시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 번역을 비롯해 떠도는 영역본을 참고해서 최대한 정확한 의미 전달이 되게 조립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는 보병대가

또 어떤 이들은 긴 노를 도열한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 말하지만

내겐 사랑하는 이가 가장 아름다워.

사람들에게 이를 이해시키기는 쉬운 일

산 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 헬렌이,

명예롭지 못한 이유로 트로이에 가려고

누구보다 훌륭한 남편을 버리지 않았나?

사랑의 신이 그녀를 타락시켜

자신의 딸과 부모와 가족마저 잊게 했지.

그녀의 일화는 지금 나로 하여금

떠나간 아낙토리아를 떠올리게 하네.

리디아의 그 모든 화려한 전차와

용맹하게 중무장한 보병대보다도

나는 그녀의 빛나는 두 눈을 보고 싶어.

그녀의 사랑스러운 발걸음을 보고 싶어.

(......)



유실된 부분이 아쉽습니다. 온전한 채였다면 읽기가 더 즐거웠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비상식적인 논리 전개가 눈에 띕니다. 첫 네 행은 사랑을 찬양하는 자의 어조입니다.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수천 수만의 일사불란한 군대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로 제시된 헬렌의 일화는 어떻습니까? 헬렌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인의를 버리고 애인과 해외 도피한 인물입니다. 사랑에는 그처럼 우리를 괴롭게 하는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면이 있지요. 그것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이가 아름다운 이유라고, 이 시는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런 역설이 왜 필요했을까요?


'아낙토리아'가 등장하며 의문이 풀립니다. 사포는 실제로 자기 친구였던 아낙토리아를 소환합니다. (일명 '레스보스' 섬의 사포는 여성 동성애자로 자주 추정되는데, 정말 그러했는지, 그렇다면 시 속의 아낙토리아와 정말 어떤 관계였는지, 정확히 밝혀진 건 없습니다.) 유비 원리에 따라, 시의 말미를 이끄는 감정선은 전반부 헬렌의 일화와 겹쳐집니다. 즉 화자가 아낙토리아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트로이로 향하던 헬렌의 맹목성과 같은 선상에 놓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마음일 것입니다. 상상 속에서 아낙토리아의 모습을 더듬고자 뻗은 '나'의 손길엔 거침이 없습니다. 리디아의 모든 전차, 모든 보병대를 끌고 와도 막지 못합니다. 사랑의 명령은 도덕률보다 엄격합니다. 인간의 가장 화려한 군세도 사랑처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마 아낙토리아를 되찾지 못할 겁니다. 그녀도 그 아름다운 것들을 뿌리치며 멀리 떠나간 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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