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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권력

2022. 01. 30.

우리가 권력을 지닌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가 더 많은 부분에서 예측 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타고난 사람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는 조금도 되어 있지 않다." 질서가 매력적인 것도, 질서에 복종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자본화할 수 있는 모든 행운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귀족적인 것이다. 천민은 무슨 말이 그 입에서 나올지 알 수 없는 운세 뽑기 기계다. 그의 경험은 무서운 것이므로 그가 경험으로부터 베운 언어도 일상적인 소통의 도구는 아니게 된다. 가장 큰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그가 외계의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불행은 다른 체계의 현현이다. 어지러운 파도 밑은 고인 물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유행하는 개량된 자유 개념이 순응성을 그 핵으로 가지는 건, 그저 체제가 장악적인 것으로 상상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체제는 우리에게 모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우리 자신을 소여를 넘어서서 살아가게끔 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해체되어야 한다. 좌절된 승리의 예감보다 완성된 패배가 항상 더 호소력 있기 때문이다. 그 말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은 오히려 자라나고 열매가 되어 굴러 떨어진다. 인간에 대해 내가 뭘 알겠느냐 싶지만, 그래도 하나 꼽자면 인간이 정말 외로운 존재라는 것 하나는 안다. 이런저런 인간의 관념도 잠자리에 놓인 커다란 인형일 뿐이다. 인형이 그렇게 푹신한 것은 그 속에 조금씩 빈 공간이 마련되어서다. 우린 거기에 푹 빠져든다. 말이 우리를 우격다짐 밀어 넣는다. 몰이해 자체의 생명력으로 사회는 미어터질 것 같다. 여론은 늘 두 방향의 말을 동시 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살아 있어요?"


좋고 설득적인 것들을 죄다 떠올려 본다. 발전한 SNS에게 그 일을 외주하면 알아서 잘 떠올려준다. 예외 없이 우릴 지배하고 수동성의 기쁨으로 내모는(최승자가 '행복한 항복'으로 표현한) 것들, '입이 있는' 개인들이 우주가 즐겨 차는 축구공마냥 도로 뭉쳐지는 신기한 체험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것들, 그것들만 평생 쫓아도 사람은 피가 마른다. 이미 고독의 공론장이 달구어진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존재자에겐 방향이 없다. 멀어지고 나아가고 심지어 나를 미래의 나에게 발송하는 힘, 그것은 삶의 시발점으로 나를 흡인하는 힘과 구분되지 않는다. 들숨과 날숨이 맞물려 있고 실상 하나인 것처럼. 방향은 오직 상상이고 우리가 자신에게 서비스하는 감각이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본능을 발견했다고 믿지만 실은 본능을 개발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우린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천리로 계약된 '온깁'이라는 말? 바로 그렇다.


따라서 권력에 맞서려는 숭고한 충동에 치여 말 만드는 사람들을 믿었다가 말았다가 우왕좌왕 할 필요가 없다. 그들도 판단을 중지한다. 자신과 합의된 세이프워드가 있다. 변혁의 의지가 그 자신에 대해 하는 일을 우리도 할 필요가 있다. 유토피아(비어 있는 것)를 봉사가 아닌 자위에 이용해야 한다. 그럴 게 아니라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그 멋진 말이 그간 대체 무슨 뜻으로 통용되었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활달한 포르노그라피의 장르는 NTR이다. 그것은 본성상 약탈적인 세계의 엄격함을 빼앗아 피탈자의 쾌락에 봉사하게 하는 놀이다. 마조히스트는 감각을 관계 전체로, 양방향으로 확장한다. 그는 깔아뭉개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깔아뭉개는 자다. 그때 그는 정말로 자신을 통제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권력의 낙차, 정확히 그만큼의 폭으로 피지배자는 우월해진다. 자기 삶이 예측 불허의 광막이고 실상 거기 가득한 매개질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추종한다. 부쩍 유행하는, "부유하게 자라고 보기 좋게 생긴 사람이 마음도 더 곱고 사회인으로서 올바르다."와 같은 말은 실증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인 진술로 생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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