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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경계

2022. 01. 31.

최근 본 영화에 대해 쓴다. 알리 아바시 감독의 [경계선]. 이 영화를 '티나'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자기 긍정의 서사로 읽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당신은 괴물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보레'의 직설적인 메세지(재밌게도 [엑스맨] 시리즈의 '매그니토'를 연상케 하는)를 고스란히 창작자의 언설로 바꾸어 들어서는 안 된다. 트롤은 문명에서 배격된 종족이다. 외모, 습성, 심지어 특출한 능력까지도 인간종의 보편적 안정감을 거스른다. 플레이타임 내내 영화 안팎의 경계선들이 시험대에 오른다. 생활의 안정을 위해 허울뿐인 관계를 이용하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티나'에게 성욕을 느끼고 접근하다가 가벼운 볏단처럼 내던져지는 '롤랜드'의 모습과, 뇌가 이렇게 작동하는 한 어쩔 수 없다는 듯 '티나'의 육체 조건에 낯섦과 당혹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관객의 모습은 한쌍이다. 마찬가지로 '보레'는 파문을 일으키라고 내던져진 인물이다. '티나'가 이름을 되찾을 때 그것은 문제로부터의 탈출도, 해소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 비로소 문제가 출발한다고 이야기는 전한다. 자기 정체를 알기 전까지, 더 정확히는 그것을 누군가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티나'에겐 고향도 적(敵)도 없었다. 제대로 작동하려면 얼마간 편협해야 할 도덕마저 전방향으로 열려 있어 한없이 민감하게 떠는 기관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긍정할 처소를 찾지 않았다. 반대로 마침내 부정성을 몸에 익혔다. 이때 도출되어 마땅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누군가를 먹이 삼는 방식으로밖에는 우리의 경계선을 그을 수 없는가?" 경계선을 그으면 된다? 안 된다? 그런 접근이야말로 트롤을 바깥으로 몬다. 이런 손쉬운 윤리적 상상 속에서 트롤은 경계선의 그음 또는 긋지 않음을 받는 존재, 그 스스로는 경계선을 그을 맘이 없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질문을 들고 와준 초월적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티나'가 아기 트롤의 입에 넣어준 벌레를 위해선 대체 누가 스피커를 마련할 건가. 그 벌레를 첫 씬에서 '티나'는 풀 위에 안전하게 놓아주었다. 그 상태가 열림이다. 그리고 방황이다. '경계선'은 우리가 방황을 마친 순간에 드러나는 어떤 선(善)의 윤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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