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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전망대

2022. 02. 01.

새해다. 머리가 맑았다가 하얘졌다가 한다. 하얗다는 것은 더럽혀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패션에서의 흰색에 대해 써둔 글을 옮겨야 하는데 어디에 어떤 형태로 넣을지 생각을 안 해두었다. 맑을 때 생각은 늘 갑작스럽다. 외경에 이른 모래사막 같다. 뇌의 돌기가 녹는다. 창밖의 풍경을 누가 밟고 가도 안 흔들린다. 거기 침입한 가볍고 날랜 새가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 새는 생각을 밟는 순간에 익사한다. 모래였던 물이다. 머릿속에서 무슨 작당을 짓고 있는 걸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는 재밌게 봤다. 관찰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무사는 집요하게 관찰자로 남으려 한다. 그의 선행은 어떤 실패다. 욕망이 흘러가고 서로 부딪히는 유압을 감상하러 전망대에나 계속 올라 앉아 있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선행도 욕망이다. 그는 땅바닥에 구획을 긋는 제 완력으로 카메라가 되고 싶어 하나 자신이 작중의 등장인물임을 구원자의 충동 안에서 깨닫는다. 이런 맥락에서 '한스케'는 무사의 복제다. 그는 늘 사건의 중심지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건 밖에 있다. 그는 연쇄적으로 위상을 옮긴다. 이야기에 시간 감각이 필요할 때는 시계가, 해설자가 필요할 때는 스피커가, 피해자가 필요할 때는 약자가 된다. 무사는 마을을 구하러 오거나 마을을 폐허로 만들기 위해 온 게 아니다. 끝까지 보기 위해 온 것이고, 그게 마을에 대한 구원이며("마을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폐허 만들기다. 전부가 교차해야 하므로. 그래서 무사는 한스케에게 농담처럼 "가서 자결해."라고 마지막 명령을 한다. 욕망의 전차에서 따로 도는 부품 같은 건 성립하지 않음을 확인한 것이다. 갑자기 총이 등장하는 배경도 재밌다. 칼을 쓰는 무사에게 총 든 자가 호적수로 나타난 것 같으나 이야기는 갈수록 총을 그 역사적 우월함에서 탈각시킨다. 총을 점점 없앤다. '우노스케'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해) 총을 쥐어달라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총을 차마 쏘지 못할 때 총은 이미 무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압력에 떠밀리는 사물 하나에 불과하다. 멋진 영화다. 내내 북을 두드리며 북소리로만 출연하던 뒷방의 권력자가 서슬 퍼런, 어쩐지 천진하기도 한, 어지러운 표정을 하고 갑자기 집에서 나왔을 때는 충격받았다. 그는 무대의 칸막이를 넘어간다. 자신이 해야 할 살인을 하자 북소리는 영영 그친다. 분위기가 바람벽을 찢고 빙의한 것 같구나. 빙의했더니 실존이 시작되는 거구나, 삶이란. 그런 생각마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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