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02.
옷이 날개인가?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익숙한 주장은 옷이 착용자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옷이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하게끔 만드는 것이 착용자의 역할이다. 정장을 입으면 정장을 주로 입는 특정한 직군 또는 계층의 사람처럼 행동하게 될 수 있다. 청바지도 마찬가지다. 찢어진 청바지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오랜만에 군복을 입으면 이상하게 껄렁대고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얘기들도 하는데, 내 생각에 그건 다른 무슨 이유보다도 두려움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좀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아무튼 옷이 주는 인상이 있고, 그 인상을 통해 옷차림은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분명한 경향이 있음을 고려할 때 옷이 착용자를 조작한다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의 옷은 침묵한다. 옷의 역사 또한 사람의 인식 속에서만 활성화한다. 외계인에게 리바이스 데님 팬츠와 암브로시 모헤어 판탈로니가 어떻게 비교되겠는가. 그들의 생김새만큼이나 역사와 역할까지도 낱낱이 분해된 조각으로 보일 것이다. 어디에 어떤 부분을 가져다 붙여도 기능하는 레고 같을 것이다. 우리가 정장을 입고서 약간 거드름을 피우거나 정중하거나 우아한 모습 등을 연출한다면 그건 순전히 정장에 대한 '합의된 상상' 때문이다. 그 옷을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옷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를 모르면 착용자 자신도 그 옷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른다. 이게 진실에 가깝다. 대량생산 시대에 의류의 형상이 그것의 함의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이래, 비싼 옷이 왜 비싼가 하는 질문은 점점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어렵다. 그보다 이런 질문이 좋겠다. 전통적으로 고급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의류(소재)는 왜 고급스럽게 받아들여지는가? 그것이 관리하기 어렵고 쉽게 낡기 때문이다. 이는 풍부한 자원 환경에 대한 인류의 오랜 애착과도 연동이 되는 기호인데, 재밌는 것은 우리의 합리성 안테나가 종종 주변에 널린 튼튼하고 시원한 면 혼방 티셔츠를 등한시하고 바다 건너에서 오는 16게이지 캐시미어 니트 탑에게로 기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개인이 놓인 자원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다. 지금 내 주변을 살펴보자면 잉크가 마른 펜이 하나 굴러다닌다. 그 옆에 스타벅스 텀블러. 플라스틱에 무늬목 시트를 입혀 만든 칸막이 책상. 이보다 훨씬 실감나는 이미지가 있다. 지금 눈앞에 없는, 어느 이름 모를 고원에서 워크셔츠를 입은 청년들이 달빛 아래 염소의 배밑을 부드럽게 빗질하는 이미지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심지어 청바지도 산 넘고 바다 건너 시간을 건너(!) 어렵게 수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 물건이 더 생생하니까. 더 살아 있으니까. 황인찬이 진은영의 시구를 받아 말한 것처럼, "더 멀리 있으니까. 더 머리 있으니까." 외계인도 용도를 느낄 수 있다. 그 말은 옳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외계인의 실용은 상상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사물을 도구적으로 더 뛰어나거나 더 귀하게 여길지는 순전히 그의 발견의 경향에 달려 있는데, 그 발견은 옷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에 대한 발견일 것이고 오직 대화의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옷이 날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옷은 날개다. 또한 옷은 이빨이고, 옷은 털이고, 옷은 눈과 뿔, 그리고 뇌다. 옷은 날개를 발견하는 수단이다. 아직은 옷에 가까운 어떤 사물에 우리가 적용할 기관(그 기관의 이름이야말로 옷이라고 할 만하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도구가 바로 옷이다. 기관의 언어화가 먼저다. 나의 팔은 몇 개인가? 내가 품위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나의 두려움은 얼만큼 큰가? 가령 군복 속에서, 우리는 묻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