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10.
브런치에서 작가 신청이 거절되어 그곳 서랍에 넣어두었던 최근의 일기들을 티스토리로 옮겨 왔다. 그리고 티스토리에 썼던 글은 따로 내용만 옮기고 다 지웠다. 브런치가 출판 목적의 글을 받는 곳이고 티스토리가 개인 공간으로서의 블로그임을 고려하면 신청이 거절당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루키나 갱스부르의 일기라면 몰라도 내 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들 이유가 없다. 적어도 그가 하는 고민을 나도 하고 내가 할 고민을 그도 하게 될 거라는 걸 적극적으로 암시하지 않는 한은. 그런데 정말 그 말대로다. 그의 고민이 내 고민이고 내 고민이 모두의 고민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대신 시작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생각이라는 걸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내 글은 읽기가 힘들다. 어렵다는 것과는 또 다른 얘기 같다. 최근에는 문학성이야말로 나에게 부족하거나 없는 자질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재주가 부족하다는 얘기일 수 있고 그것과 또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내 글은 읽기 쉬울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나에게나 내가 쓴 글에게나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글은 이미 내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 안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의미를 감싸며 가장 바깥 피부를 이루는 것은, 정작 의미의 보관소인 글 자체이기 때문이다. 읽기는 탐험이 아니라 관찰이다. 영원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감각 위에 오감을 얹어 즐기는 행위다. 글은 나에게 입체가 아니고, 삶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삶에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삶의 줄기에 이르는 지도를 발행할 수 없다. 삶에 줄기가 있다면 나는 거기서 밀려나는 방향으로만 시간에 참여하고, 모두의 참여가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삶처럼 글에도 음악에도 영화에도 흡인력은 없다. 그들은 튕겨낸다. 그러나 물속에서 우리는 어떤 흐름을 느끼는 즉시 그쪽으로 자신이 빨려들어가고 있다고 느끼게끔 감각이 조정되어 있는 존재다. 친밀함과 두려움이 다 여기서 나온다. 실제의 우리는 맴돌고 있을 것이다. 쉬운 길도 어려운 길도 없다. 예전에 오히려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더 '발행'에 가까운 걸 했던 것 같다. 글과 그림을 섞고 그 상관물을 보다 생생하게 만드는 것, 어조라고 할 만한 것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일은 그들 중 누구도 하고 있지 않았다. 글의 내분비계인 상상력이 기대 가능한 모든 효과를 선취하고 있었다. 호르몬은 해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이 작용하기 때문에 형태가 해석 앞에 드러눕는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이해마저도 상상력이 다 하고 있었다. 일기는 그래서 좋다. 딱히 규칙이 없는 글인데 한편으로는 강한 규칙이 흐른다. 작위적인 시간 단위에 따라 사건과 사유를 갈라내라는 것. 오늘은 어제와 내일로 뒤섞여 있다. 오늘의 게임을 벗어나는 욕망과 주제와 반응의 일부가 갑자기 게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부력에 따라 오늘이 다른 날, 다른 장소로 조금씩 밀려나게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일기는 그 한가운데를 퍼올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트랙이다. 숲에 들어갔다가 호수에 잠긴다. 그러나 달리도록 마련된 트랙이고, 누군가 달려서 만들어진 트랙이다. 달리는 사람 앞에는 갈수록 더 두껍게 공간이 겹친다. 위에서 덮쳐 보는 청사진에는 그 밀도가 반영되지 않는다. 희게 칠한 방. 흰 빛이 가구이고 그것을 밀 때 방 전체가 밀려나는 방. 그쪽이 내 뇌의 풍경에 훨씬 가깝다. 그리고 뇌의 풍경이 바로 세계의 풍경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뇌가 생각이라는 걸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