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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약맛댕댕이 Mar 08. 2022

퇴사 마음 굳히기

삐딱선을 타다


 만 1년을 2개월 앞둔 날, 1년을 채워 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자 했던 나의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 도리어 깔끔한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대로면 하면, 인사고과 잘 받을 수 있어’라는 사탕발림에 신경쓰지 않고, (최근에 안 사실: 새로운 연봉협상에서 나의 사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만 연봉이 오르고, 신입사원 전체는 연봉이 동결되었다고 한다. 우리 밖에 연봉이 오를 사람이 없다며 설득하던 날들이 기억난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 내 인생이 해방되는 느낌. 어차피 나간다 마음먹은 상황에서 사직서를 들이밀고 내 불만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내가 이런 부분이 힘듦을 알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잔다르크를 자처했다. 




Episode 1: OO님, 직접 좀 하세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은 직장인의 업무 기본이다. 나 역시 이벤트 후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고, 그 결과를 정략적 수치로 나타내려 함수와 씨름하고 있었다. 깔끔히 정리해 파일을 넘겼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온 말은 “보기 쉽게 벤 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해달라”라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지시를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기껏 정리한 것을 그 방법대로 다시 함수를 풀어 정리하라니…


 해당 지시가 그 사람의 평소 업무지시에 비하면 사실 어렵거나 놀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원래 상대방의 업무 프로세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업무지시를 했고, 그날 또한 자신이 한 것처럼 보고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지시를 한 것이리라. 하지만 난 곧 나갈 사람.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난 말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벤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기에 적합한 데이터가 아닙니다. 직접 하시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잠깐의 정적, 누군가는 아차 싶었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숨이 막힐 뻔했다고 하겠지만 전혀. 속이 다 후련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보고 지금 나는 내 일 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냐며, 일을 불친절하게 한다고 쏘아젖혔지만, 타격감은 1도 없었다. 


 한 달 동안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역겨움을 참느라 화장실로 뛰어가 구역질을 하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심호흡을 하던 내 증상들이 모두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한번 내가 별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좀... 스스로 해.. 할 줄 아는게 머니..? (출처: Google)

 



Episode 2 | 직급은 직급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네가 알아서 일하라는 나의 태도에 무엇이 크게 잘못됨을 느꼈는지, 몇 시간 후 회의실에서 단둘이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때가 왔구나, 놀라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실망감을 느껴왔는지만 전달하자고 대뇌이며 회의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요즘 왜 이렇게 삐딱선을 타나며 혹시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 했다. 하나하나 그의 잘못된 말을 고쳐가며 나는 조용히 차근차근 내 말을 시작했다. 



“삐딱선이 아닙니다. 저는 이번 이벤트를 혼자 준비하면서,
신입사원이 언제부터 담당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생각했습니다.
신입사원은 담당자를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담당자의 역할을 안게 되었고,
입사한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인턴까지 살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직접 참가하지도 못하면서,
담당자가 혼자 고생하면 되지라는 말은
본인이 담당자로서 역할과 소임을 다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앞으로의 업무
이런 식으로는 진행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이번 이벤트 혼자 준비했다고 생각해? 다 도와줬잖아”



제가 ABCDE 안 만들어서 기획한 거 사수님께서는 선택만 하셨습니다.
제작 또한 디자이너와 협업했지 사수님과 협업한 기억은 없습니다.
본부장 하물며 팀장 직급도 결정만 할 수는 없는데,
언제부터 그 밑의 직급이 결정만 하는 직급이었나요?” 




그 사람: 앞으로 계속 이렇게 못하겠다고만 반복해서 말할 수 있는 거 아니니? 



“저도 이번 이벤트 3일 전까지만 해도 저 혼자 나갈지 몰랐던 것처럼,
사람 일 함부로 예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확답 못 드리겠습니다.”


캬 시원해:) (출처: Google)

 

 긴 침묵이 끝나고, 회의실 바깥을 나왔을 때, 팀원들에게 엄청난 톡이 와있었다. 뭔데 저렇게 소리를 지르냐고. 내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은 채, 그의 소리만 들렸다고 말이다.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던 부하 직원의 SOS 신호가 그에게는 삐딱선이었을 뿐이었고, 삐딱선을 타는 부하직원에게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그였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회사에 없다. 만약 회사에 불만이 있다면 이를 해결해 줄 사람도 없다. 본인이 아니라면. 나는 회사는 문제 해결을 하는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 후, 평소에 잘 알지 못하는 선배에게까지 티타임을 요청하고, 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만행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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