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남과 동거를 마음먹게 된 계기 1
오늘은 ‘이 사람과 동거를 해도 괜찮겠다’라고 마음먹은 계기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사실 연애에 있어 내가 꼭 지키는 규칙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을 꼭 같이 가본다’이다.
여행은 평소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새로운 풍경 속에서 재밌는 경험을 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지만, 개인적으로 커플들에게 여행 경험을 추천하는 이유는 여행 준비와 여행 중간에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 때문이다. 계획대로(혹은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는 커플이라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해결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나중에 서로의 의견 차이나 가치관 차이로 인해 물러날 수 없는 설전을 벌여야 할 때 필요 없는 말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실제 나는 여행의 세부계획까지 설정해 놓는 것을 좋아하는 ENTJ의 인간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나 발생했다. 그리고 그때 상대방의 대처 방법은 정말 놀라우리만큼 그 사람 본연의 성격을 드러내주었다.
에피소드 1
여행 계획 짜기를 평소 좋아하다 보니 매 여행에서, 주로 내가 여행을 제안하고, 계획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루틴을 변경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여행을 기획해보라 하고 기회를 준 적이 있다. 당시 목적지가 순천만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우리가 묵을 숙소와 밥 먹을 식당, 볼거리 등 아무것도 추가 정보를 알지 못했다. 기차에서 내린 후, 네이버 지도는 주변에 숙박시설이 전혀 없을 법한 동네로 우리를 안내했다.
예상했겠지만,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 싶었던 숙소가 바로 우리 숙소였다. 마치 90년대 영화에 나올 법한 건물 외관과 언제 세탁했을지 모를 이불, 창문 시트지는 바닷바람에 다 벗겨져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입실하자마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벙쪄있던 나와 그 사이에 깊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내가 아닌 그의 훌쩍훌쩍 울음소리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이상한 곳을 예약하게 되어 속상했다고 한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더욱 빡친다. 울음으로 커버치지마 동거남아..)
이미 예약한 숙소에 입실도 했고, 다른 숙소를 알아볼 기력도 없어(배가 고팠고, 우리는 싸우면 밥 먹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 밥 먹으려면 화해해야 함) 그냥 밥이나 먹자라고 제안하려는 찰나에,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유료 리듬게임 결제 알람이었다.
잉? 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알람을 보자마자 폭소를 금치 못했다.
나와 동거남은 아이폰의 가족 공유 서비스를 활용한다. 이 애플의 가족 공유 서비스는 구성원으로 등록된 멤버 중 한 사람이 유료 앱을 결제하면, 나머지 구성원도 앱을 구매하지 않아도, 앱 사용이 가능한 서비스이다. 평소 리듬게임을 좋아하고, 한번 게임에 승부욕을 느끼면 게임 클리어를 위해 밤을 새는 나에게 그는 이 장소 안에 있어도, 게임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리듬게임을 선물했던 것이다. 게다가 엔간한 시중 무료 리듬게임은 이미 다 해봤던 것을 알기에, 유료 리듬게임만이 내가 숙소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안 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새벽 내내 리듬게임을 하다가, 손대고 싶지 않았던 이불은 최대한 덮지 않고, 퇴실 할 수 있었다.
당장 돌아갈 수 없다면, 이 장소에서 뛰쳐나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내가 동거남이었어도 막막했을 것이다. 그는 유료 리듬게임을 선물했고, 나는 그의 선택에 만족하며, 다음 여행을 기약할 수 있었다.
PS. 그는 그 이후로 야놀자 숙소 사진에 속지 않는 호텔 신봉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