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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Feb 04. 2021

위이~이잉~ 휘이이잉~~~


  외손자가 태어나 160일을 지나고 있다. 딸이 아기 실내수영장 도구를 인터넷을 이용해 월 삼만 오천 원에 빌렸다. 어제 택배로 받아 깨끗이 소독하고 비닐 수조에 물을 채웠다. 막상 물을 채워보니 시간이 제법 소모되었으며, 맑고 깨끗한 물을 버리기 아까웠고, 뒷정리도 만만치 않았다. 또 물세가 올라갈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한 가지 장점은 아기가 투명 비닐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


  딸이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였다. 수영할 손자의 목에 튜브를 걸었더니 처음이라 그런지 두려움을 느꼈다. 벗겨낸 뒤, 내가 허리를 구부려서 안은 아기의 발을 물에 담그며 서서히 적응시켰다. 물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큰 무리는 없었으나 튜브는 거부하였다. 비닐 욕조의 물 내버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딸이 손자만 할 때 버릴 물도 없는 관사에서 살았다.


 나는 82년 1월 하순에 쌍둥이를 출산하였다. 한 달여 대구 친정에서 몸을 풀었다. 남편이 혼자 김포공항 경비부대 관사로 이사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도꼭지는 있으나 배관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기저귀는 세탁기에 수북이 쌓였다. 부대 수조차(水槽車)가 매일 물을 실어 나르게 되었다. 부대에서 큰 통을 빌려오고, 내 집에서 물을 받을 수 있는 용기는 밖으로 죄다 불려 나왔다. 


  바깥의 물통에 담긴 물을 양동이에 옮겨서 실내 세탁기로 갖다 부었다. 그렇게 기저귀를 빨았다. 네 번 돌아야 할 세탁기면 한 번 정도는 물이 부족하여 중단시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세탁기의 강한 탈수로 오줌기가  빨리 빠지는 거였다. 외손자는 좋은 시절에 호강하면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자라니 얼마나 복이 많은가. 


  딸은 드럼세탁기를 사용한다. 세탁조에서 많은 물로 세탁이 되지 않는다며 두 번씩 가동하였고, 또 헹굼 탈수 단추도 한 번 더 눌러 구연산으로 기저귀를 부드럽게 해 줬다. 마무리하는 구연산과 더러움을 씻어낼 세제는 유기농이나 친환경적인 제품을 이용한다. 내가 딸을 키울 때는 생각지도 못했고 일단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그 당시는 세탁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서 유기농이다, 친환경이라는 용어마저도 아는 바 없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상전벽해가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마다 힘들게 기저귀를 빨았다. 관사 마당에는 아주 길게 늘어진 빨랫줄이 있었다. 30여 장 이상을 널었다. 보안부대에 근무하였던 맏 시숙이 공항으로 감사를 나오면 멀리서도 허연 기저귀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조카와 내가 있는 줄로 짐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기저귀 개수가 많았다.


  80년대 초 김포공항 외곽과 강서구 주변 지역은 여느 촌이나 다름없었다. 이사한 뒤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관사 가까운 마을에서 쌍둥이 딸을 낳아 기르던 내 또래가 대문을 두드렸다. 두드린 것이 아니라 철조망이 둘러쳐진 관사 밖에서 큰 소리로 나를 찾았다. 행인들이 안을 흘끔흘끔 훔쳐보며 지나다닐 수 있는, 전면이 탁 트인 관사였다. 그녀가 하는 말이 "우리 동네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는 거다. 자기도 시집와서 듣고 겪어보니 정말 그렇더라면서 장화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라나.


  참말이었다. 바람이 불면 황토먼지가 날렸다. 비가 오면 내 발이 벌건 땅속으로 푹, 푹 빠지는 동네였다. 마른 기저귀를 해지기 전에 걷으면 촉감이 묘했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두 딸 옆에서 기저귀 개기도 바빴다

. 황토 빛도 비쳤다. 그런데도 두 딸은 신통할 정도로 건강하게 잘 자랐다. 물이 오면 데워서 두 아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빨고, 분유 태울 물 따로 담아놓으면 바닥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 우직하게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두 딸이 나의 벗이었고, 말동무였고, 남편이었다.


  해가 지면 달랑 한 채뿐인 관사 주변에  공항 경비 보안등이 밝혀졌다. 온 천지가 환했다. 그래서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런데 무서운 것이 있었다. 관사가 지어지기 전에 미군 야전 병원이 있었다고 들었다. 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건물을 허물고 떠났는지 그 흔적이 역력했다. 미군이 떠난 자리는 공항과는 별개로

드넓었다. 그 황량한 벌판에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소리가 나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안방 문을 열고 건너 방으로도 갈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어릴 적에 친구들이랑 귀신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다. 그리고 들었다. 바람이 전선(電線)을 흔들고 지나가면서 "위이~이잉~" "휘이이잉~~~" 잉잉 소리를 냈다. 우리는 귀신의 울음을 “위이~이잉~~" "휘이이잉~~~" 입으로 실감 나게 묘사했었다. 오줌이 곧 나올 것 같은데도 두 딸을 끌어안고 방문 문고리조차 잡는 것이 두려웠다. 남편은 오지 않았고, 바람이 거친 날은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이 관사가 마음에 들었지만 위리안치(圍籬安置), 집 둘레에 가시울타리 대신 철조망이 둘러 쳐진 관사에서 귀양을 살고 있다는 상상도 되었다.


  한 번씩 시가에 가면 시어머니께서 "얘, 너는 내가 기저귀를 뽀얗게 빨아서 주면 왜 누렇게 해 갖고 오니

?" 덜 빠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런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황사(黃沙) 탓임을 알았다. 기저귀는 일단 푹석거렸다. 느낌이 고운 입자의 황토였다. 그때서야 서해안을 건너오는 황사와 장화 없이 못 사는 동네의 영향이라 판단했다.


  나는 29에 첫 아이를 키우는 벌거숭이였다.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운지도 몰랐다. 내 어머니는 나를 맏이라고 소중히 여기며 손에 물이 묻지 않도록, 심지어 생리대까지 빨아주었다. 그러니 임금이 벌거벗고도 잘나서 멋있게 보이는 줄 아는 그런 벌거숭이였더랬다. 참으로 세상모르고 한 세월을 보낸 것이 민망하다. 그리고 그 관사에 나의 가족만 살았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내 딸은 참으로 유식하다. 항상 손에 책을 들고 공부하여서 학문적으로 손자를 교육한다. 나는 딸을 보면 여러 가지로 많이 부끄럽다. 어미가 무식하여 영민한 두 딸의 앞길을 더 열어주지 못했고, 손자처럼 딸에게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뒤늦게 많은 나이로 딸에게 배우면서 손자를 돌보고 있다. 그런 딸이 둘째를 가져서 금년 6월 하순이면 출산을 한다. 내 자식 다 키운 후이지만 육아책을 읽어야 할 상황이 또 닥쳤다. 나는 딸에게 책의 내용이 뭐 그리 대수냐고 무식하게 반박한다.


  그러나 장담할 것이 있다. 외할머니의 열린 사고가 안정적이며, 푸근하게 손자를 긍정적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 나는 “이쁜이가 있어서 할머니는 행복합니다. 내 곁에 와주어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손자의 궁둥이를 토닥거리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업어서 재웠던 손자를 잠자리에 눕혀 놓고 들려주는 말이었다. 매일 잠을 재우면서 나의 사랑을 손자 귀에 대고 고백하기도 했다. 


  근래는 손자를 얼른 재운  뒤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사진: 정 혜


대문사진은 손자가 갓 태어나서 신생아실 유리벽 너머로 바라보며.

아래 사진은 2020.4.27 금호강 잠수교에서 노란 갓 꽃이 핀 봄날에.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23120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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