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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Aug 18. 2020

닷~씨는, 나오능가 바라

  땀이 등에서 주울 줄~. 단독주택, 40년 이상 된 내 집에 돌아왔다. 냉방기가 빵빵한 딸내미 아파트 생각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후끈하게 들었다. '공연히 왔네~' 이내 '더워도 손자에게 붙잡히지 않으니 여기 있어야 해' 그러나 고슬고슬한 피부가 그립다. 대가가 따르는 아파트로 가야 하나. 망설여진다.


  지난 목요일부터 딸이 휴가를 냈다. "엄마도 휴가 드릴 테니 푹 쉬다 오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더운 곳으로 귀가하고 쉽지 않았다. 설탕처럼 단 말은 금새 "엄마, 선우 데리고 바닷가에 다녀올까?" 역마살의 대명사는 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그래 볼까." 마침 아들도 회사를 쉬고,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내 여동생을 데리고, 손자를 카시트에 앉힐 요량으로 출바알~


  손자님께서 막무가내로 카시트에 매이기를 거부했다. 아기지만 그 싫음에 강도가 어른 뺨 칠 정도. 별 수없이 한 좌석을 애들 이모와 나누어 앉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ㅎㅎㅎㅎ 엄마와 이모, '환상의 조합'이 있어서 바닷가로 갈 엄두를 냈던 거야. 이모 좀 참아 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옹알이를 하며 몸부림을 쳐댔다. '내가 왜 나서 가지고 이 고생이람' 차마 입으로 뱉지 못했다. 손자가 집에서도 잠이 들려면 난리 부르스를 추는데…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 나오면 안 새는 것이 아니고 더 샌다. 평소 조카 손자를 이뻐하는 이모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낼모레 60과 70은 상당히 벅찼다.


  "아들아, 잘 자라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내가 앞 좌석의 아들에게 고백했다. 내 아들은 군인인 아버지 덕에 차에 실려서 여행을 많이 했다. 아들은 기억도 없지만. 그때 남편은 내가 고생한다며 장모와 처 이모 또는 장모의 직원들까지 태워서 군인 휴양지를 돌았다. 아들은 손자처럼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유달리 손자는 잠잘 시간에 못 자서 안달하며 괴로워서 나부댔다.


  나는 아들을 의도적으로 아랫도리를 벗기고 윗도리만 입혔다. 아들의 사진을 보면, 꼬추가 드러나 있는 사진이 많다. 아들은 내게 안겨서 자기도 했고, 바뀌는 바깥 사물을 보느라 눈만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손자는 장거리 떠난다면서 종이기저귀를 했다. "언니야, 선우 똥 싸는 갑다. 저 인상 쓰는 것 쫌 바라. ㅍㅎㅎㅎ" 똥 싸며 인상 쓰는 것도 귀여워서 여동생이 손뼉을 치고 난리다. 승용차를 한갓진 곳에 댔다.


  작열하는 태양, 뜨겁게 달구어진 도로에서 열기가 훅! 확! 올라왔다. '나는 안 내린다. 느그끼리 해결해라

.' 뒷 좌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아들, 딸과 이모가 내려서 손자를 어쩌지 못해 한바탕 생 쇼가 벌어졌다. '안 내린데이. 못 내린데이.' 고생하는 가족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혼자 삼켰다. "엄마! 좀 나와 봐." 딸이 그랬지만 나가지 않고 버텼다.


  "엄마, 쉬었다 갈까?"  딸이 물었다. "무조건 달리재이. 야 가 더 큰 소동 일으키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재이. 어서 가자." 휴게소 간판이 보이면 "무조건 달리라. 최대한 빠른 이동이 해결책이데이~"  딸이 숙박할 곳이나 쉴 수 있는 공간을 예약하지 않았다. 손자가 카시트를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랬다. 딸이 당일치기는 가능하리라 아들에게 약간 후한 점수를 준 결과는 "이유 대지 말고, 빨리 도착하능기 상수다."


  딸은 아들에게 바다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 내외가 쌍둥이들을 데리고 다닌 기억이 날 것이다.  남편 역시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철 모를 때는 좋아라 따라다니더니, 뭘 좀 알 무렵에는 지 아비를 싫어하여 대놓고 차 안에서 가기 싫다며 아버지 부화를 돋우었던 딸들이다. 지금은 아버지에게 샐, 샐 대면서 기쁘게 해 드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향을 이해하려 한다.  


  "해안가 그늘에 차를 대고 거서 자리 깔고 좀 앉았다 가까" 내 말은 씨도 안 먹혔다. 더 갈 길도 없었지만 집에 갈 경우 모래사장에서 차와 가까워야 했다. 나는 양산을 쓰고 뜨거운 모래를 힘겹게 밟을 적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딸은 아들을 안고 씩씩하게 바다를 보려고 전진했다. 손자는 눈이 부셔 고개를 숙이고, 내 아들은 두 모자에게 양산으로 빛을 가려주었다.


  "누나, 내가 운전해?" 딸은 동생에게 "아니. 나는 운전만 할 거야. 넌 좀 참아." 갈 때는 그랬다. 한산한 바닷가, 바람이 불어서 무척 시원했다. 바가지요금도 쓰지 않았고, 코발트 빛 바닷물이, 수평선 너머로 하얀 갈매기가 나르는 구름은 나를 붙들었다. 태황태후가 되어 평상 위 간이용 의자에 앉아서 우아하게 바다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손자님은 망아지처럼 마구 풀어놓을 수 없었다.


  "니 가 운전해" 찜질방을 염려해서 동생을 차에 먼저 보냈다. 아들은 차의 냉방기부터 가동하고 모래사장을 헤치고 조카를 데리러 왔다. 누나의 모자(母子)를 햇빛으로부터 막아주고, 두 무수리는 바리바리 들고서 찜질용 모래를 밟으며 한여름날 추억의 발자국을 어지럽게 깊이 남겼다. 여동생이 조수석으로 가고, 뒤에는 딸이 아들을 마주 안고 내 옆에 앉았다.


   "내가 닷~씨는 나오능가 바라. 태황태후가 무수리가 대가 이기 무신 꼴이고." 내가 웃으며 진담 반 농담을 하자 다들 더워도 웃기 바빴다. 나는 작년까지 태황태후의 자태로 느릿느릿 걸으며 피서를 다녔다. 무수리는 무수리의 역할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태황태후의 반열이다. 태황태후가 손자님 덕분에 예약되지 않은 휴가지를 찾기는 처음이다. 고상하게 그늘에서 내 어머니처럼 손자를 돌보려고 했던 것은 모래사장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였다.


  태황태후는 현대의 할머니다. 퇴임 전, 그동안 남편 덕에 삼 남매와 군인 휴양지를 돌면서 편안한 휴가를 보냈다. 얼마 전까지 반목했던 남편이 가족을 소중히 아꼈고, 말없이 베풀었음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태황태후는 파도와 같이 동해로 사라졌고, 손자를 안고 '쩍 벌려 앉은' 딸의 팔에 눌려서 꼼짝도 못 했다. 주무시는 손자님을 안고 계시는 딸의 팔을 빼낼 수 없었다.


  닷~씨는, 나가능가 바라" 캤는데, 딸이 또 "엄마! 내일 운문사 바람 쐬러 갈까?"

역마살이 슬금슬금 도진다. 이 일을 우예야 되노?


  

                             사진: 정 혜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06423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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