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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Nov 14. 2020

"'나'는 오온(五蘊)이다"

포토 에세이: 심우도

  꽉 찬 항아리에는 더 담을 수 없다. 비가 오면 빗물이 넘치면서 튀어나올 뿐이다. 그러나 빈 항아리는 빗물 차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득 담긴 옹기를 두드려대는 난타, 비어 있는 단지에 떨어지는 음향, 바닥에 깔린 넓적한 돌의 낙수 소리가 죄 다르다. 촉촉이 땅에 젖어드는 소리 또한  비 오는 날 듣는 나만의 수용(受容) 교향곡이다. 


 비가 올 듯 우중충 했던 하늘이다. 갑자기 구름이 삽시간에 걷히면서 쾌청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사진 찍기 바빴다. 화창하지 않은 날의 사진은 공연히 우울한 감이 든다. 발품은 팔고, 눈은 공양간 벽화를 찾았다. 웬만한 절마다 심우도(尋牛圖)는 회칠한 벽에 그려져 있다. 영천 은해사 극락보전의 벽화는 보수를 해야만 했다.


 공양간 외벽에도 심우도가 있으나 목조건물이 아니다. 극락보전의 벽화는 마모가 심해서 그림의 의미를 모르는 분들은 그냥 지나가기 십상이다. 심우도는 공양간 입구 외벽의 그림이 선명하여서 올려다보며 감상하면 된다. 처음에는 그림을 위로 쳐다보며 옆으로 봐서 인지 의미를 빠르게 알 수 없었다. 공양간 건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본다. 심우도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길들여지지 않은 소에 비유하였다. 


  목동(수행자)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고삐를 들고 여기저기, 가깝고 먼 곳을 다 돌아보며 소의 흔적을 찾는다. 목동이 보이는 발자국을 따라서 를 찾게 된다. 소는 끌려 오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목동은 붙잡아서 고삐를 매어 길들여 가는 과정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아래 첫 번째 그림은 고삐 들고 소를 찾는 심우(尋牛). 

소를 찾는다(尋牛)는 뜻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즉 나는 오감(눈에 보이는 대로, 소리에 이끌려서, 향기를 따라서, 맛집으로 향하고, 촉감이 느껴지는 대로 행동한다.)에 이끌려 다녔다. 그리고 욕심내고, 욕심대로 또는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나고 상대에게도 마구 분노를 터트린다. 이 분노는 때리고 싶은 폭력이 수반되며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강력하다. 따로따로 일어나는 마음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므로 이때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위나 행동의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 이 분노를 조절 못해 타인과의 관계가 삐거덕 대거나 틀어져서 등을 돌린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세 가지 독(毒)이며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심우도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가는 그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 소의 자국을 발견하는 견적(見跡). 그림의 손 끝을 따라가면 그림 중앙 연두색 위로 희미한 발자국이 보인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려왔거나, 바깥 대상들이 이끄는 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아, 이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야. 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지…' 모든 것에서 회의가 느껴진다.

심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멍하니 흐릿한 정신상태가 이어진다. 심한 사람들은 우울증으로 발전하여 그 아픔을 호소하기도 한다. 가정생활이나 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셋째,  견우(見牛). 오른쪽 위 바위 끝으로 누런 소 꼬리와 엉덩이가 보인다. 


  견우(見牛)는 나의 주변과 관련된 것을 사유하면서 고심(苦心)에 고심을 거듭하며 드디어 원인을 찾아낸다. 안에서 길들여졌던 눈에 보이는 대로, 소리가 이끄는 대로, 향기를 따라서, 맛을 찾아서, 촉감이 느껴지는 대로 행동했던 것, 삼독심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부(富)를 거머쥐려고 악착스레 살아온 자신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소의 꼬리처럼 조금 보이는 삶을 반추하게 된다.


넷, 득우(得牛). 소를 찾아내어 코뚜레에 고삐를 매어 잡아끌지만, 소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네 발로 완강히 버티고 있다.


  자존심 강한 사람을 소처럼 고집이 세다고 말한다. 고집은 자기주장이다. 그러나 그 주장이 일방적이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내가 옳고, 맞다고 우기며 주위를 돌아볼 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른 삶이 눈에 들어온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니었고, 내가 한 말은 다 맞는 것이 아니구나'를 어렴풋이 소 꼬리가 보이듯 알아차려진다.

  그렇지만 벌 망아지처럼 멋대로 살아왔던 습관은 뇌 깊숙이 고정되어 있다. 소를 찾았어도 붙잡아서 고삐를 매기도 어렵고, 끌고 가기는 더 어려운 것이 나 자신이다. 명상을 해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고삐를 맨다, 이끌고 간다는 의미는 산만한 마음으로 인하여 가부좌하고 앉으면 5분도 못 되어서 다리가 아프고 잡념들이 떠올라 산란해진다. 

  나는 만약 본인의 나이가 30대이면 석 달을 산란한 채 또는 '왜 안 되느냐고' 흥분하여 씩씩 거려야 한다고 말해준다. 넉넉히 40은 넉 달, 60은 여섯 달을 고생하리라 작정하고 내 마음과 싸울 요량으로 느긋하게 앉았으면 의외로 빨리 소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러면 신이 나 앉아서 빨리 평온한 마음이 되고 싶어 진다.


다섯, 목우(牧牛). 누런 소의 머리와 목 부분이 하얗다. 바깥 대상에게 끌려 다니던 나, 그리고 삼독심으로 물이 들었던 나의 때가 약간씩 벗겨지는 과정이다. 


  보이는 사물을 쫓아서 다니던 마음이 희한하게도 가라앉으면서 쫓아다니던 것들이 싫어지고 귀찮아진다

. 삼독심이 옅어지면서 자식, 아내나 남편,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거나 구부득고(내가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증회고(죽이도록 원망스럽고 미우며 만나기조차 싫었던 사람이 조금씩 이해 되려 한다), 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오음성고 쉽게 말하자면 오감에 길들여져 왕성하게 쫓아다니고 날이 새도록 그것을 찾아 헤매던 마음들을 놓아버리게 되는 과정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에서는 '나를 찾는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정작 부처님은 '나를 찾는다'라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나'는 오온(五蘊)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오온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다. 바깥의 대상들을 나의 눈으로 보고(色), 소리를 듣고(聲), 향기(香)를 쫓아서, 맛(味)을 보며, 느껴지는(觸) 대로 행동하는 것이 '나'다. 만약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러나 더 이상 없다.


  '나'는 내 안에 있다. 그러므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행을 떠나면 나를 잠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된다. 그렇지만 완전히 내 안의 소란스러움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나는 찾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는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명상수행과 함께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세 사람이 선원으로 가기 위해 동승했다. 주고받는 대화가 서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내가 그녀에게 하는 말은 튕겨져 나왔다. 그녀는 "그런데에 그기 아입디더~"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그녀의 확신적인 말을 들으며 '모래 바닥에 세운 내 집이 최고야'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바르게 알려주려고 하면 "에 해이~ 그기 아이라카이~ 내 말 좀 들어보이소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입을 다무는 버릇을 키웠다. 남편은 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앞세웠다. 내가 두 어 마디 하면 가로채서 결론을 내버렸다. 친정어머니 또한 당신 주장만 했다.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았다. 내 속만 부글부글 끓다가 가라앉기를 수십 년. 아예 나보다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서는 남편부터 지인이나 법우들을 보면 '입을 다물자'를 혼자 되뇐다. 어느 날부터 설득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던 사람이다. 나의 상대도 어처구니없었겠지. 그도 나처럼 입을 다물었을 테니까. 나는 튕겨져 나가는 말을 주워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귀로 나가 버렸다. 나 또한 아직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려는 인품의 소유자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자' 그녀의 옆에서 읊조리며 나를 추슬렀다.


  말은 입에서 나온다. 말이 나오기 전에는 찰나라도 생각부터 한다. 생각이 바르면 말은 자동적으로 고운 말, 좋은 말을 하게 된다. 바른 생각은 먼저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선행조건이다. 바른 견해는 스승의 올곧은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여 알고 있다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말을 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불자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인 불경이, 기독교의 천주교나 개신교는 신,구 성경이 된다.  


  그러니까 말은 입으로 하며 한자로 입 구(口)자를 쓰고,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은 행위에 속하므로 행위나 행동을 업(業)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구업((口業)이라 하며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구업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저 단어일 뿐이다. 그러나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모욕적인 말이나 욕, 저주하거나(얼마나 잘 되는지 두고 본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아파서 죽으라는 욕들이 저주다) 거짓말을 예사로 하거나, 여기서는 저 말을 하고 저기서는 이 말을 하여 분란을 일으키고, 유익하지 않은 말이나 시기적절하지 않은 말, 심하게 악한 말을 하면 악업이 쌓인다. 은행의 예금이 늘어나듯 좋지 않은 업(惡業)과 선업(善業)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런 사고를 지닌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달고 산다. 자연히 얼굴은 어둡고 인상이 원만하지 못하다. 아픈 곳이 또한 많다. 말하는 대로 삶 또한 살아지게 된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삶을 유도한다. 내가 한 말의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된다. 악한 말이나 듣기 거북할 정도의 비꼬는 말, 비하하는 말, 저속한 말들은 나의 인품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말하는 순간 악업으로 쌓인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좋은 말도 다 못 하는데 악담을 꼭 해야만 할까. 너도 나도 좋은 결과가 있으면 모르되, 전혀 그렇지 않다.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니 정확한 것을 모르고 주워들은 소리와 내 경험이 옳다면서 들어보라고 한다. 나도 그랬으면서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줄 읽은 글이 나의 입을 틀어막도록 했다.  



기우귀가(騎牛歸家). 하얗게 변한 소 등에 앉아서 유유자적 피리를 불며 집으로 가고 있다. 


  부정적인 사고를 할 때는 내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말조차 표독하게, 뾰족한 송곳을 내면에 간직한 말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도 모른 채 했다. 그럴수록 몸은 더 아팠다. 붓다의 가르침대로 작디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푸니 사는 세상이 달라졌다. 내가 가르침을 공부하여 실천해보니 별천지에서 살아졌다. 모르는 만큼 좁은 테두리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지만, 생각을 바꾸니 의식이 변화되어 넓은 천지가 내 집이다. 고정관념에 묶여 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일단 어깨부터 편안해졌다. 아픔도 서서히 사라졌다. 나도 하얗게 변모해갔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잊고 막대기에 걸망을 꿴 채 자신의 길을 가는 목동만 남았다. 

  

  잡다하니 수많은 생각들은 내려놓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다 잊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며 해탈의 경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반본환원(返本還源). 본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깨닫고 보니 내가 있던 본래 그 자리더라.


 *흐린 이 순간을 나타내려고 하늘을 주제로 삼아 사진을 찍었다. 

        


  입전수수(立廛垂手). 본래 자리란 내가 태어나서 공부하며 자란 속세로 돌아와 보니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이 보였다. 이젠 그동안 배운 가르침을 펼칠 때가 왔다는 의미이다. 스님이 하산하려고 지팡이를 잡고 서서 바라보고 있다.  


  심우도는 대승불교를 대변하는 불화이다. 그림의 의미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어린 아들이 벽화를 보고  "아빠, 저게 뭐야?"라고 물으니 아버지 왈 "저것이 벽화란다."라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아니면 어린아이를 무등 태워서 휙 하니 둘러보고 "다 봤다. 집에 가자." 하면서 서둘러 자동차를 타고 떠나기 바빴다.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석가모니 붓다의 경전에는 그 어디에도 '나를 찾는다'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나'는 오온(五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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