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Oct 24. 2020

모란의 향기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대문을 열자 모란이 한눈에 보였다. 물끄러미 화단을 바라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불쑥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그제야 이해 되었다.

 

  이른 봄부터 모란 가지마다 변화가 생겼다. 잎 봉오리가 팥알 만한 크기로 봄이라며 전입신고를 했다. 모란의 싹은 두릅처럼 생겼다. 첫 잎이 점차 넓어지니 줄기 부분에서는 봉긋하니 꽃봉오리도 함께 자랐다. 봉오리를 감싼 겉잎이 한 장씩 펼쳐지면서 잎으로 역할이 바뀌고, 또 초록 꽃봉오리는 크기가 점점 커지며 자줏빛 꽃잎의 내면을 채워갔다. 이파리는 계속 나왔으며 꽃봉오리도 함께 커졌다. 원인이 결과와 동시에 성장하였다. 이미 봉오리라는 원인을 간직한 채 결과를 향해 형체만 변하고 있었다.


   모란 꽃봉오리는 초록색 꽃받침에 둥글게 감싸인 채 끝이 뾰족했다. 봉오리는 꽃잎이 겹겹으로 단단하게 말려 있다. 꽃이 피려고 끄트머리가 열리는데도 하루 걸렸다. 첫 번째 꽃잎 끝이 어렵사리 약간 들렸다. 임산부의 산고가 느껴질 정도로 더디게 벌어졌다. 둘째, 셋째 꽃잎도 완전히 펴지기까지 이틀 이상 온몸을 뒤틀며 배 아파했다. 한낮의 열기가 꽃을 활짝 피게 하였으나, 심한 산통으로 피어난 꽃은 이 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모란 꽃은 탐스럽게 만발하며 차고 기울었다.


   모란은 향기가 없다. 꽃이 소담스럽게 피었건만 몇 년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우리 집 화단에 피는 꽃은 붉은 자줏빛이다. 노란 수술이 무수히 많아 볼수록 부귀(富貴)가 연상된다. 그런데 모란 꽃 주위에서 향이 느껴졌다. 강한 냄새가 역하기까지 하여 근접하기도 부담스러웠다. 역설적으로 모란 꽃은 향기가 있었다. 벌 나비가 화려한 색을 보고 날아들다 급 선회 하였다. 모란 꽃에는 벌 나비가 오지 않는 줄 알았다. 내내 그렇게 짐작했다. 곤충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는 향기 때문에 나도 다가서기 힘들었다. 며칠 곤충들의 상태를 관찰하며 모란 꽃 주변을 서성였다. 내가 모란 가까이 다가서기엔 강단이 필요했다.


   모란 꽃은 하나씩 툭, 툭 떨어졌다. 마지막 한 두 잎은 꽃받침을 꽉 붙들고 지저분하게 매달려 있었다. 색이 거무튀튀하게 말라 비틀어져 추접한 몰골을 하고도 놓을 줄 몰랐다. 다른 꽃들은 꽃잎이 모두 떨어지고 암술과 씨방만 남았다. 그러나 모란 꽃의 한 두 잎은 달랐다. 씨방이 성숙해져도 메마른 채 붙들고 있었다.


  언제 적 나는 어머니와 나이 많은 이웃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였다. 그 당시 어머니는 “나 같으면 곡기(穀氣)를 끊는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연명 안 한다.” 곡기를 끊겠다던 결연한 의지 표명은 두고두고 나의 화두가 되었다. 어머니는 2018년 9월에 고관절이 부서졌다. 급성 류머티즘은 지병으로 수십 년을 동고동락 하였고, 척추협착증으로 왼쪽 대퇴부 고관절부터 종아리가 항상 저려서 걸음을 오래 걷지 못했다.


  육신은 고령이 되면서 갖은 병명이 늘어났다. 두어 달 전 즈음 어머니께 안부 전화 말미에 조심스레 여쭈었다. ‘곡기를 끊는다’는 말을 기억하느냐고. 오히려 그런 적이 있었느냐며 거짓말처럼 나에게 되물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궁리해봐도 우선 배고파서 곡기를 끊을 수 없고, 죽는 것이 두려워서 못 하겠더라 ‘고 말했다. 어머니처럼 나도 과거의 일은 아이들이 물어보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내게도 벌어졌다.


  어머니는 모란 꽃이었다. 모란 꽃이 그렇듯 엄마가 계시는 아파트에 가기 싫었다. 한 번 가려면 몇 날 며칠 뜸을 들였다. 기분 좋게 들어섰다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얼굴 붉히고 나오는 것이 예사였다. 어머니는 일단 시작한 것은 끝을 보았고, 그렇지 못했을 시 기절해 버렸다. 그런 어머니의 인상은 병마에 시달려 무서워졌다.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원망의 흔적만 두꺼웠다. 본능적인 감정에 연연하였고, 오로지 살겠다는 의지만 거머쥐기 바빴다.


  어머니 9살 즈음, 외할머니가 영면하셨다. 남달리 영특하였던 엄마는 학업이 중단되었고, 외숙모들의 눈총과 괄시를 받으며 어렵게 자랐다고 했다. 큰 외숙은 1950년대 초 친정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 교장으로 여동생인 어머니를 소개하여 18살에 시집을 보냈다. 어머니는 조용하고 말수 적었던 아버지가 성에 차지 않아 무시하고 존중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젠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았을 때 수심 가득한 채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긍정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셨는데, 그런 표정은 쉬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곁에 없었다. 수예점을 한다, 계주(契主)를 하며 부(富)를 축적하려 동분서주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계가 깨지면서 안방이 비었다. 아버지는 선비였다. 한 달 뒤 사표를 내고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셨다. 전라도 오지에서 교사로 재취임하여 근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정과 학교 밖에 모르던 분이었다. 아마 어머니에 대한 나의 반감은 이 시절부터 쌓였다고 생각한다. 매달 월급은 6 식구 생활비, 나의 하숙비, 학비 등으로 엄마는 인상 펴질 날이 없었다. 자존심 강한 엄마의 화단에는 모란 꽃 향내가 가득했다. 동토(凍土)의 겨울은 봄을 밀어냈다.


  얼어붙은 세월은 피나게 모질었고,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태도는 병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나 나를 행동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가족을 사랑으로 감싸며 어루만져 줄 줄 몰랐다. 의아해 했던 사진은 고된 혼인 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조금씩 파악하였고, 나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마음을 달리 가지던 시기여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머니는 하던 사업이 안정되자 그나마 안온했다.


 내 자식들은 하나 같이 “엄마는 외할머니와 똑같아, 어쩜 그렇게 닮았어.” 아이들이 그럴수록 철저히 달아나려고 내뺐다. 나는 어머니로서의 부족했던 부분을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말이란 모름지기 바른 말을 배워서 올바르게 사용하는 훈련(가정 교육)이 필요했다. 고운 말이나 좋은 말의 습관은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몸소 ’지옥은 극락이다.'를 체득시키는 나의 붇다 였다. 내가 전생에 어머니의 처지가 되어 원인을 만들었고, 금생인 지금 그 과보를 겪었다. 노모가 눈 감은 뒤 후회하지 않으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던 행위들은 오히려 나를 편안히 해주었고 자존감이 높아졌다. 노모는 곡기를 끊을 수 있는 강단과 사리판단이 정확했던 분이었다. 그러나 모란 꽃 향기의 윤회는 척박했던 땅에서 오래도록 되풀이됐다.


  어머니는 살아있는 부처님이었다. 나의 작은 깨달음들은 ‘어머니에 대한 사유와 마음 챙김‘으로 가능했다. 붇다는 끊임없이 나를 깨우쳤건만, 나의 의식 밑바닥에는 잘라낼 수 없는 인연을 끊고 싶어 하는 ’나‘

뿐이었다. 발인 하는 날 ’어머니와의 인연’은 끊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항상 올바른 생각을 하면 곱고 순한 말이 절로 나왔고, 콩 한 알도 나누는 실천이 날마다 좋은 날인 것을 어머니가 깨닫게 해 주었다. ’어머니와의 인연’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올해는 모란이 진통을 겪으며 꽃을 피우고 지는 것도 며칠 만에 지나가 버렸다. 적어도 보름은 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정된 암술은 다섯 개의 씨방이 가을을 채워갔다. 올해는 씨방이 6,7,8개로 변형되어서 놀랐다. 외출했다가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란을 바라보다 난데없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벌 나비가 옆에 오지 않고 멀리서 빙빙 돌다 떠나는 것을 보면…”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125455092

작가의 이전글 피서지에서 생긴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