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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Dec 18. 2020

정말 미안해. 내 마음 알지?

3- Day 15   가장 최근 당신을 화나게 한 사건에 대해 자세히 써주세요.


  거실에는 어젯밤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서재로 오는 복도에도 온통 손자의 책이며 장난감이 흩어져 있다. 그냥 그런가 보다로 보이지 않는다. 일단은 못 본 것으로 하고 물만 마시고 서재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도 이것저것 잡다히 올려져 있다. 옆으로 밀어내고 내가 필요한 공간만 확보했다. 어지러이 널러져 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치우지 않을 수 없다. 젊은 것들은 흩트리고, 늙은 사람은 치우고…


  남편은 전에 하지 않던 설거지와 쓰레기 분리수거 및 음식물 찌꺼기를 버려 준다. 어느 날 딸의 아파트로 불시에 쳐들어 와서 자원봉사를 생색내며 하고 있다. 사위는 아침마다 출근 전에 바닥 청소를 하려고 애를 쓴다. 손자가 며칠 전까지 기어 다닐 땐 필히 닦아내려고 용을 썼다. 이번 주는 남편이 여행을 떠나고 없으니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 수북하다. 그러나 사위는 토요일에 하려는 건지 손도 대지 않는다. 


  딸은 둘째를 가졌다는 핑계가 꼼짝 하기도 싫은가 보다. 사위보다 딸이 더 얄밉다. 미루기만 하면 사위도 하지 않는 설거지를 누구 보고 하라는 것인지. 아이가 먹은 젖병에 물을 부어 놓으면 우유를 컵에다 부어 마시게 하라는 말인지… 40을 바라보는 내외한테 스스로 하도록 두려니 속이 터지려고 한다. "하이고~ 이것들에게 잔소리를 좀 해?" 긴 소리 짧은 말을 내뱉었으면 좋겠건만…


  딸이 출근 시간을 늦추었다고 말했다. 내가 아침 먹을 시간이 없던 차 손자를 맡기고 밥상을 차렸다. "나도 늦게 일어나 말할 자격은 없지만, 엄마도 빨리 일어나서 7시 즈음 밥을 먹고 그래." 나는 끓였던 떡국 냄비의 뚜껑을 말없이 덮었다. 그리고 손자를 딸에게서 받아 안았다. 마침 남편이 거실로 나오면서 "당신 한의원에 태워다 줄 테니 빨리 준비해."라는 말에 짜증을 내며 되받았다.


  "나 혼자 갈 거니까 안 태워 줘도 돼요." 내가 남편에게 손자를 안겨주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코로나 때문에 버스 타고 다니지 말라고 해서 그러지" 밥도 못 먹은 아내는 안중에도 없고 그놈의 코로나가 그렇게 무서워. "코로나고 지랄이고 나 혼자 가겠다는데 왜 자꾸 그래요오!" 냅다 소리를 질렀더니 딸이 "아빠, 저가 엄마를 화나게 했어요." 부녀가 시선을 주고받는 듯했다.


  나는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자 시원함이 느껴졌다. 남편은 며칠 전에도 짜증을 내던 나에게 잊지 않고  둘만의 공간에서 나를 나무랐다. 남편은 나를 안전하게 승용차를 태워 준다지만, 나의 짧은 자유로운 시간을 방해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편하다.  그러던 그가 입을 다물고 손자를 안고 거실 창 쪽으로 갔다. 나로 인하여 집안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을 알아차리며 나 또한 불편해졌다. 나는 손자를 안고서 출근하는 딸이 승강기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짜증을 내서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를 했다.


  "엄마, 나도 미안해. 엄마 힘든 거 다 알아. 정말 미안해. 내 마음 알지?" 손자가 승강기에 오르는 어미에게 잘 다녀오라는 듯 "에~ 에!"라며 말을 했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들어온 남편에게 "여보, 짜증 내서 미안해요." 기분 좋게 말을 건넸다. 남편이 운전을 하면서 "딸에게도 얘기했지만, 아침부터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은 하지 마라. 엄마의 힘든 고충을 딸이 이해해야만 한다."라고. 그러면서 딸이 게으르고 부모 심정을 배워가는 중인데 어쩔 것이냐고.


  남편이 중재를 참 잘해 주었다. 부모가 다 큰 자식에게도 필요한 이유다. 자식의 잘못된 점을 아버지가 심히 나무라면, 어머니가 자식을 어루만지며 아버지를 이해 시킨다. 그 반대로 나처럼 어머니의 노고를 알아주어야만 한다며, 아버지가 자식의 감정에 동조하면서 당근과 채찍 역할을 부모가 번갈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정 교육이다. 그리고 중재는 부모와 자식 사이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오늘도 나는 힘이 들지만, 자식이 말없이 보고 배우기를 바란다. 그리고 손자에게 말을 앞세우는 교육보다 조용히 보여주는 모범적인 언행을 했으면 한다. 부모가 좋은 가르침의 일 순위이기 때문이다. 손자가 가장 먼저 가족을 대하면서 배우는 것이 말이자 부모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지금 손자가 그러고 있다. 내가 바른 생각과 언행으로 살아가는 것이 손자에게  본보기가 되므로 나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 베푸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더 이상 바람은 욕심일 뿐이다.



사진: 정 혜

손자는 동백꽃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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