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Dec 25. 2020

털어내고, 또 탈 탈 털렸다

3- Day 20        108일 글쓰기 후기


  108일 간 탈탈 털었다. 그리고 털렸다. 그래서 시원섭섭하다.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하나?'라는 고민할 것 없이 주어진 명제로 글을 매일 쓰다시피 했다. 108일, 비교적 수월하게 써 오던 글을 계속 쓰지 않게 되어서 섭섭하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져서 시원하다. 꼭 써야만 했던 글의 완성도는 차치 하고, 108개의 화장기 없는 내가 나를 마주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에서  "《해변의 카프카》이 장편소설을 쓸 때, 어떤 이야기가 될지 전혀 알 수 없지만(나는 늘 어떤 이야기가 될지 예상하지 않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쨌든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자, 라고." 그리고 또 "쓰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더없이 낙관적인 전망을 바탕으로 일단 시작했다(아실지도 모르지만 소설가에게 낙관적인 정신이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질이다.) 하였다." 


  그런데 나도 108일 글 쓰는 내도록 예상하지 못한 글들이 써졌다. 108일 간 글을 쓰면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술술 글들이 지면을 채워갔다. 나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 그렇게 썼고, 잘 풀어지지 않을 땐 손자와 놀면서 틈틈이 사유를 했다. 그리고 그 날 밤이나 토요일 밤에 완성 시켜서 글을 공유했다.


  나는 앞으로 나만의 글을 계속 쓸 것이며, 나만의 문체를 활용하여 변화를 시도해보면서 꾸준히 나 답게 써 나가는 일만 남았다. 하루키 작가는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라며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나는 108일 글쓰기 이전부터 새롭게 써보려고 궁리를 했으며, 언어유희를 해보려고 전전긍긍 하는 나이기도 하다. 나는 이 후기를 쓰면서 잡문집의 마지막 장을 읽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말씀처럼 '예사로운 말과 단어들을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주는 것'이 나 또한 해야 할 일임을 깨우쳤다.


   어젯밤 늦게 '미스 트롯 2 마스터 오디션'을 잠시 시청하였다. 그중 한 출연자가 유독 인상이 깊었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절절히 끓어오르는 슬픔을 자제하며 열창하였던 나의 애창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비 가수는 이 노래의 깊이와 맛의 묘미를 제대로 알고 살렸다. 그녀가 살아온 아픔 그 이상을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마스터 중의 한 현역 가수가 2등이면 어떻고, 3등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이미 가수인데 등수에 연연하지 말고, 좋아하는 노래를 오래도록 부르다 보면 큰 결과도 얻어지더라고 위로했다. 2년 전에도 이 방송을 했다. 그때도 남편과 함께 볼 기회를 가졌다. 촉망받는 가수나 인정받는 글쟁이가 되고 싶은 소망은 별 차이
없다고 사려 되었다. 단지 글로 표현하느냐 노래로 실력을 발휘하느냐 라는 차이일 뿐이다.


  가수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타고난 끼와 꾸준한 끈기로 목소리와 기량을 연마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의 운도 한 몫 했다. 글을 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108일 간 나 자신을 담금질해 봤다. 내가 지치지 않고, 손자로 인하여 중도 하차할 것은 아닌지 의심 한 번 하지 않았다. 오로지 글을 있는 상황으로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탁월한 글 재주가 없다.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나를 성찰하며 쓴다.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어도 문단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시도는 쉬지 않았다. 그 인연은 참으로 닿지 않았다. 브런치라는 매개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던 차 공심재 108일 글 쓰기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미스 트롯 2를 시청하였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도 읽는 우연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먼지를 털어내 듯 털어냈다. 주어진 명제가 털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워내면서 성찰하던 나의 경계를 뛰어넘게 되었다. 관조하는 세계로 들어섰다. 연연함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었고, 높이 날아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를 관망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왜 시작을 했을꼬.'라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러나 둔재인 나는 그저 지금 이순간에 만족하고, 나다운 글을 쓰는 것이 최고라고 여기는 귀중한 108일이 되었다. 이런 장을 마련한 공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사진: 정 혜

                        손자와 나.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185058358

작가의 이전글 초 엿새 달은 떠 오르고, 붉으스름 노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