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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Dec 26. 2020

澗松과 백남준과의 만남

  2017년 1월 1일 오전에 카톡이 왔다. 딸은 나와 정신없이 다니다가 계획한 것을 하나도 못했다고. 예쁜 내 딸은 그래도 무척 즐거웠고,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고 하였다. 뽀뽀 의성어가 있는 이모티콘도 곁들여서


  딸은 지하철이 두더지 같다며 싫다고 했다. 여러 번 컴컴한 지하공간을 통과하여 그렇다나. 나는 그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지하철은 지하도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불빛이라고는 거의 없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지하 선로에도 오늘에 앞선 어제가 지나갔다.


   내가 딸의 빨래를 갰다. 저 마음에 들지 않아 두 손이 간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나는 딸이 못마땅했지만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그대로 두었다. 내가 이것을 손대면 기억 못 한다며 가만 두라고 펄쩍 뛰었다. 또 저것을 만질라치면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내 손을 붙잡았다. 딸은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면서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내가 자식들 교육시킨다며 아이들에게 그랬다. 딸이 그대로 보고 배워서 눈 앞에서 재현하고 있으니 마치 나를 보는 듯했다. 딸냄이가 머리 굵어졌다고 어미를 가르치려 하는 것도 보였다. 이 녀석이 한 마디도 빠지지 않고 또박또박 이의를 제기하며 걸고넘어졌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무슨 말을 하려고 시도를 하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입을 다물었다. 


  자식이 똑똑하니 어미가 불감당이다. 어미가 말을 하면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딸은 엄마의 말에 수긍할래도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며 대꾸한다. 어미가 딸이 받아들이도록 발언하고 있지 않다면서 되받아 쳤다. 딸의 이의제기에 "너의 새끼가 질문을 해도 지금처럼 대답할 것이냐"며 몰아붙였다. 내가 괘씸하여 딸에게 들이대면서도 ‘이건 아니다'를 직감했다. 나는 이미 뱉은 뒤였다.  


  딸은 미래 일을 이 순간에 왜 하며, 둘 만의 대화에 없는 손주까지 끼운다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기세등등하다. 나는 딸의 반박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글이 줄줄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모녀의 대화를 글로 쓰면서 무절제한 나의 발언을 수습했다. 딸은 마지못해 "아! 그래요.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라고 하면서 거칠게 무마시켰다. 나 또한 이미 알아차림 하여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한 간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만 감돌았다.


   우리는 동대문 역사공원에서 입을 열었다. ‘간송(澗松)과 백남준과의 만남' 전시회 주제로 대화를 재개시켰다. 살벌했던 시간은 우리를 더 다정하게 손을 잡도록 했고 말꼬리도 터주었다. 나는 살얼음을 조심스레 피해 다녔다. 간송(澗松)은 일제강점기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고서화와 골동품, 유물 등을 수집했다. 그 문화재 중에서 조선 시대 유명 화가 몇 분의 그림과 현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님의 작품을 만나며 비교해보는 전시회였다. 조선시대 작가와 현대 작품의 재해석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전시회였다. 세대 간 차이를 절묘하게 이어놓은 작업이 또한 돋보였다.



   딸이 얼마 전 김장을 도와준다며 겸사겸사 잠시 대구를 다녀갔다. 우리 모녀의 대화는 평행선이었다. 내가 딸에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대중가요 제목을 댔다. 딸 曰 소통되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헤어졌다. 우리는 舌戰으로 호되게 오전을 장식하고, 전시회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희희낙락이었다. 두 딸은 특히 작은 딸과는 여행이 잦았고, 전시회도 딸의 권유로 나 혼자 종종 다니고 있다. 나는 안목이 높은 딸 덕에 덤으로 높아지고 있다. 나는 "정신적 교감이 잘되는 친구이자 딸이어서 자랑스럽고 고맙다."라고 했다. 딸 역시 어머니 덕분이라며 연한 배처럼 굴었다. 


   나는 점심식사 후 딸 이름을 불렀다. 지난번 대구 다녀 갈 때 찝찝했던 것, 오전의 부끄러웠던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넌지시 어미의 부족함을 이해해 달라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의 삼 남매를 부드럽게 대응하며 키웠더라면 여유로운 감성의 소유자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미안하였다. 딸도 "어머니 말씀에 네, 잘 알았습니다."로 싹싹하게 대답하겠다며 웃었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전시회, 역사, 영화, 불교, 정치 등 다방면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딸의 강한 제동이 느껴졌다. "얘야 그건 이렇고~" 하면 딸이 내 말을 부정했다. 내가 설명을 하려니 딸이 '이건 이래~'라며 옆구리를 잘랐다. 내가 설명을 하려는데 딸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나를 되려 이해를 시키려 들었다. 나는 평행선을 최고의 속력으로 달렸다.

  

  지하철이 잠시 역에서 정차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새로운 승객들이 들어오면서 문은 닫히고 이내 출발하였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하면 많이 변했다고 한다, 너희 자매는 어미를 과거의 사람으로만 기억하니 참으로 답답하다고 말했다. 딸은 어떤 심리학자가 나의 말은 '어머니 생각'이라고 표현했다면서 지지 않고 응수하는 것이다. 같잖은 심리학자가 감히 긍정의 대명사인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딸의 비유에 '어미는 그런 수준을 벗어난 상태'라고 자신 있게 항변했다. 딸은 나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들이댔다.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들고 날며 열렸던 문이 닫혔다. 나는 생각을 고르는 순간이 교차되었다. 많은 새로운 승객들이 객차 안을 채웠다. 나는 딸에게 나의 변화된 모습을 버선 뒤집듯 보여주고 싶었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딸에게 "변화된 어미는 인정받고 싶고 걸맞은 예우도 그립다."라고 하면서 팽팽한 대화를 종결시키고 싶었다.


   딸도 남동생에게 변화된 자신을 알아달라면서 싸웠다고 했다. 우리 둘이 접전을 벌이듯 저희 남매도 평행선을 달리며 고성이 오고 갔다는 말을 해주었다. 딸은 어머니만의 요구가 들린다고 하였다. 작은 딸이 그런 표현을 계속하라고 나에게 권했다. 딸도 그제야 어머니의 심정이 공감된다면서 말이다. 딸은 동생과의 대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다.

 

  딸은 나에게 종종 '어머니만의 표현'을 하라 했다. 나는 한다고 했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현재 마음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한 말을 남이 느끼는 감정에 집착하여 변명하기 바빴다. 그런데 오늘 우리 모녀는 하나가 되었다. 딸도 자신이 한 말에서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를 찾았다며 좋아했다. 딸은 나에게 무엇이 장애였는지 물었다. 당연히 내가 한 말에 "그랬었니? 내가 그랬구나~"로 긍정적인 표현을 하며 나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새 지하철은 지상으로 나와서 달렸다. 바깥 사물이 훤히 보였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과 주택들이 서로 마주치며 지나가고 있다. 모녀간의 대화는 송구영신(送舊迎新) 하는 하루였다. 


   

사진: 정 혜

2016년 12월 31일, 대문사진과 아래는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은 동대문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했던 백 남준 님이 작품.



https://blog.naver.com/jsp081454/22090290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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