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준한 산을 오르면서 보이는 저 봉우리까지 가면 가풀막진 길은 끝이려니 했다. 자세를 낮추어서 호흡을 거칠게 내뱉으며 앞만 보고 올라갔다. 정상에 도달하고 보니 내리막 길이 남아 있었다. 하산은 쉬우려니 잠시 편안했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다 하여서 다시 신들메를 조였다. 그리고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산기슭의 평평한 곳을 찾았다. 올라갈 땐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내려올 때는 주위를 돌아볼 경황도 없었던 그 길을 뒤돌아 서서 유심히 쳐다보았다. 가볍게 시작한 산행이 벅차기만 했던 그 길을 왜 돌아볼까.
남편이 두 딸의 생일을 물었다. 이어서 우리의 혼인 기념일도 확인했다. 대답은 하면서도 전혀 생각지 않는 물음에 귀를 의심하였다. 남편과 살면서 처음으로 딸의 생일과 기념일 챙기는 소리를 하다니. 어른들 말씀이 "남자들이란 물건은 그저 나이를 먹어야 철이 드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속 터지는 소리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 시커먼 세월이 딱 40년이다. 그런데 내 생일까지 물었으렸다.
나는 음력으로 섣달, 12월 생이다. 그리고 혼인 기념일은 양력으로 1월이다. 또 나의 두 딸과 아들도 섣달에 태어났다. 문제는 두 딸이 음력설 전전날 태어났다. 친정어머니는 산부인과에 나를 입원시키고 설 쇨 준비 하러 시장에 가신 사이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전갈을 아버지께 받고서 정신이 혼미했다니. 그래서 아이들은 애매하게 한 살씩 더 추가되어 양력으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다섯 식구 중 넷은 양력 1월과 2월 초에 생일이 몰려있다. 남편만 음력으로 추석 전 날이다. 남편 생일은 언제 적부터 양력 10월로 바꿨다.
매년 1월에는 약 스무날 차이로 나와 딸의 케이크를 먹었다. 2020년에는 무엇으로 마음이 삐뚤어졌는지 수원에서 딸이 내려오고 시집간 딸도 왔건만, 남편은 뒤로 젖히고 누워서 아니꼽다는 듯 빈정대며 같이 촛불을 불지 않았다. 두 딸과 아들이 웃으면서 즈 아버지를 구슬렸지만 얼음덩어리였다. 남편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아버지께 방실방실 대했다. 일 년 만의 대반전인 질문이 믿기지 않아서 의아했다.
이번 나의 생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두 딸은 토요일. 하루 차이로 미역국을 끓여야 했다. 그런데 사위가 딸의 미역국을 끓여준다고 했다. 또 선동이가 나의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난 지난해까지 내 손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그 어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 일인 양 묵묵히 했다. 그런데 딸이 아침에 끓이겠다고 하여 원만하게 미역국이 해결되었다. 남편은 일주일 전부터 과대광고를 대대적으로 하였다. 심지어 두 시누이 내외에게, 가까운 조카들, 친구한테도. 아들은 코비드 19로 오지 못한다며 미안해했다.
후동이가 도착했다. 남편은 딸이 가방을 놓기 무섭게 두 딸에게 꽃바구니부터 안겼다. 내게도 주었다. 남편이 처자에게 꽃바구니를 내미는 것은 족보에도 없는 일이다. 꽃바구니 속에는 봉투까지 꽂아서. 그리고는 사진 찍으라고 강요를 하여서 서로 찍어주며 희희낙락했다. 이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비역 군인이 부하들에게 선물 주고 기념사진 찍는 수순이었다. 말 그대로 딸과 나에게 밀어붙였다. 남편은 봉투도 바로 뜯어서 보라고 볶았다. 와우! 이런 멋진 남편이 있나. 내게는 두툼한 거금 하나가 누렇게 꽃을 피웠다. 남편의 표정이 무척 자랑스러워 보였다. 나도 '리액션'이라는 과장을 좀 하였다. 아무튼 헤어지지 않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25일은 혼인 기념일이다. 남편이 케이크를 사들고 딸의 아파트로 왔다. 손자가 촛불을 끄겠다면서 상 위로 마구 기어올랐다. 그와 내가 함께한 인생 여정은 40년이다. 손자가 혼인 40년의 결정체이자 선물이다. 손자가 흩어진 마음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보물 덩어리다. 속담에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속담에 대입하면 내가 잘 참았다는 말이 된다.
이혼은 어느 부인을 막론하고 한 번씩 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남편과 헤어진 후 나의 경제력이, 자식이 어려서 콩쥐 신세로 전락할까 봐, 또 장성한 후 혼인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여러 이유로 주저앉게 되었다. 그런데 삼 남매는 성인으로 각자의 삶을 잘살았다. 그래서 황혼이혼이라는 패를 과감히
남편에게 던졌다. 억제하며 사는 것보다 나 다운 인생을 위해서. 그러나 노후의 여력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어설프게 추한 노년은 이별보다 더 괴롭다. 단순하게 슬며시 패를 거두어들이고 마음의 문을 잠가버렸다.
남편은 속이 여리다. 겉은 무쇠 덩어리지만, 심성만큼은 올곧은 사람이다. 그것을 아는 내가, 부처님을 닮고자 수행하면서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바른 마음가짐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성찰하였다. 보이는 그대로가 남편이다. 닫힌 문은 남편이 두드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열어두고 기다리자. 그가 변화하여서 열린 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둘이서 사는 집은 냉동창고였다.
허겁지겁 내려오는 산길은 미끄러울 뿐 아니라 다리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두 다리로 굴곡지고, 잡을 것이 별로 없어 주저앉은 채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다시피 했다. 산기슭에 당도하여 숨을 고르며 왔던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려왔지…' 아주, 아주 한참 뒤에 남편이 도착했다. 우리는 앞뒤로 서서 말없이 걸었다. 어느 날 남편이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나도 나이가 많아지긴 했나 보다. 자꾸 내면의 어린 철부지가 떠나지 못한 그 화상을 이해하려고 하니 말이다. 나라도 일찍 가슴을 열어서 내면의 아이와 결별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거늘… 나야말로 밴댕이 속처럼 굴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인사였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입으로는 온갖 아는 척 다 하면서 안으로는 빙산을 키우고 있었으니…
그럼 그렇지. 한참 잘 나가나 했더니 또, 저분 입이 나왔다.
사진: 정 혜
두 딸의 생일 선물로 향기를 은은히 풍겨준 백매화.
백매화 두 송이는 나와 남편을 의미한다.
우린 쳐다보는 방향이 매화처럼 거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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