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미꽃은 사돈이다. 셀 폰에 하얀 장미꽃으로 사돈을 저장했다. 5월 어느 날, 붉은 장미꽃을 찍어 사돈에게 카톡으로 날렸다. “장미꽃이 사돈보다 못 하지예?” 내 딸은 공무원이다. 딸이 며느리로서의 빈자리가 보여서 사돈에게 꽃 사진을 종종 보낸다.
사돈이 내게 전화를 했다. 점심 식사를 하자며 어디로 나오라는 것이다. 식비는 돈 버는 사돈이 지불하는 것이라며 번번이 나를 말린다. 나는 기분 좋게 다음에는 내가 산다면서 미리 약속을 받아낸다. 인연 맺은 지 오 년이 다가오지만 식비 계산은 거의 사돈이 했다. 사돈은 내가 백수라 그런다지만,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사돈은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젊은 녀석들 많이 가는 유명 커피 집으로 인도했다. 잘 먹지 않는 커피를 주문하고 매장 분위기 등 두런두런 대화가 오고 갔다. 사돈은 웃으면서 당신 아들을 거론했다. 나는 사돈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말씀을 들어주었다. 사위는 사돈이 경영하는 장애어린이 집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사위는 사돈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요모조모 따지고, 보육교사들의 고충을 대변한다며 물색없이 나서고, 거기다 원내(院內) 일도 원리원칙을 내세우면서 옳으니 그르다느니 입바른 말을 했던 듯하다.
사돈은 구청에서 5명뿐인 여성국장 중 한 사람으로 퇴임했다. 또 젊은 시절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양가 어른들의 도움으로 남매를 키웠다. 산전수전 다 겪고 공중전(空中戰)만 못 해본 수완이 뛰어나고 노련한 분이다. 사위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사돈의 심기를 많이 건드리고 있나 보다. “이 자슥이요오~ 즈그 엄마를 핫바지 조고리로 아는지…” 연신 웃어가며 말씀하였지만 속이 곪을 대로 곪아 터진 눈치였다. “내 막 머라 캤심더. 35년 공무원 밥 먹은 이미 앞에서 이기 머하는 짓이고! 니가 이 사회를 알마 얼매나 알아가 자꾸 따지고 덤비노!” 나는 사돈 편을 들어서 “잘 했심더. 머라 카는 김에 더 카지예~” 내가 한 수 더 떴다. “사돈예. 내 아들이 그럿심더. 내 한테 이카는데 사돈한테는 오죽하겠능교. 사돈이 내 아들 이해 하이세이”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다. 사돈에게 벽창호처럼 행동하니 나한테도 그러는 줄 알고 선수를 치는 중이었다. “사돈이 그카마 나는 더 부끄럽심데이. 사돈 며느리는 더 하마 더 했지 윤 서방이 몬 따라 갑니데이. 며느리 잘 부탁합니더~ 그저 넓은 마음으로 감싸 주이소오” 내 딸이 4년 연상이다. 걱정은 하지 않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나이를 들먹댈까 조바심도 없지 않아 있다. “며느리는 선새이닙더. 눈치라도 있어가 할 말, 안 할 말 가릴 줄도 아는데 우리 이거는 그런 눈치도 엄심데이” “세상사는 기 그리 만만한 줄 알고 멋도 모르고 까분다카이.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재치도 필요하고, 융통성도 있어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 아입니꺼. 이 자슥은요~ 원리원칙만 내세우는 기라예. 내가 이래 속상한기 하루 이틀 아입니데이.” 사돈이 훌쩍 커피를 마신다. 내가 “사돈, 서로 자식을 나눈 마당이니 가들 쪼매마 더 기다려 주입시더. 인자 삼십 대인데 하늘 높은 줄 모를 때 아입니꺼” 그랬더니 “그래도 그렇지예. 즈그 엄마한테 그캐가 되능강. 사돈이 아무쪼록 이해하이 세이~ 어디가가 말도 못 하고 속 터져 죽겠십디더. 사돈한테 하소연 쫌 하고 나이 그래도 속이 후련 합니더”
아들이 내게도 있다. 사돈이 울분을 토해낼 땐 은근히 내 아이들, 특히 아들이 고마웠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불만일 뿐 뚜렷한 것은 없다. 내 아들은 소싯적 나와 비교한다면 정말 잘하고 있다. 그래서 잔소리가 입까지 올라와도 꾹 다물 수 있었다. 부족한 나이지만 모범을 보이고 사노라면 훗날 바르게 살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런 날이 오고 말았다.
일 년 전 시간제 일을 시작했다. 힘이 들었지만 버텼다. 늙은 삭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불감당이었다. 윗돌 내려서 아랫 돌 고이고, 아랫 돌 빼서 윗돌 얹는 식으로 견디다 보름 전부터 완전히 허물어졌다. 아들이 여러 차례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나도 벌써 손을 놓고 싶었지만 후속 대안이 마련되지 않아 미련스럽게 다녔다. 아들은 아픈 몸으로 핑계를 대며 일을 계속하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말다툼 끝에 알았다.
일요일 점심때였다. 주방에서 덜그럭 대는 아들을 불렀다. 엄마는 이렇게 저렇게 아프다고 ‘나, 전달법’을 시작했다. “나는 엄마 말 듣고 싶지 않아” 두어 마디 듣자마자 강한 어투로 나의 말을 막았다. 모로 고개를 돌린 아들은 차디찬 철벽이었다. “왜 일 그만두지 않는데? 아프다면서 일 계속하려면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아들 말은 듣지 않고, 고집대로 하는 엄마와는 대화가 안 돼.” 이어서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못 미더워서 일하러 가는 거잖아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를 마구 몰아붙였다.
높은 산이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취업 준비하는 너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말이 잘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한심하고 초라해져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아들에게 방을 나가라 손짓했다. ‘꺽, 꺽‘ 울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서 “내가 자식 잘못 키웠구나” 일부러 억지소리를 했다. 질질 울면서 아들에게 넘어간 패를 되찾으려 용을 써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들은 협박을 곁들여 가며 나의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나는 일 그만두는 조건과 아들이 원하는 한의원이 아닌 전문병원으로 갈 것을 거래했다.
사실 나는 일반 병원보다 한의원을 선호한다. 병원 의사보다 약을 못 믿어서다. 아들은 병원 의사 말이 곧 하느님이다. 아들이 못마땅하지만 주관적인 차이를 그대로 수용하려 했다. 한데 아들은 하느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르라고 한다. 나도 '이 자슥이 지 어마이를 뭘 로 알고...'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써먹지 않았다.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괘씸해야 할 아들이 큰 산으로 다가와 나를 푸근히 감싸 안았다. 아들은 협박 같은 박진력(迫眞力)으로 나를 품었다. 그동안 내가 아들에게서 조금 부족하게 여겼던 부분을 채워 주웠다. 아들이 한참 뒤 죽을 사들고 들어왔다. 내게는 응석 같은 협박이었지만, 대들은 아들은 마음이 아팠나 보다.
뒷날 사돈을 만나면 “사돈, 울화통 터지던 그 마음 100% 공감합니더.”라고 말해야겠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11층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눈 내린 아침의 산 정경.
아래 사진: 활짝 핀 장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