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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n 19. 2021

영화는 영화일 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다


  그의 스러져가는 생은 저 화려한 노을빛이 아니었을까. 거센 불꽃같은 삶의 이면에는 먹구름이 몽글몽글 밀려오는 줄도 몰랐으리라. 전 세계가 장작불처럼 활활 타올라서 서서히 사그라들었지. 그러나 암운(暗雲)이 드리웠고, 또 레테의 강을 건넜지만 여운은 오늘날까지도 만조(晩照)를 머금었다. 만조는 홍조(紅朝)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름날 초저녁의 석양을 보며 '퀸'의 일원인 프레디가 떠올랐다. 또 얼마 전에는 사위의 서재에서 퀸의 공연 CD를 찾아냈다. 주인공 프레디의 일생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아마 오늘 노을주홍빛 구름이 어울릴 같다. 몇 년 전에 관람했던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분이 연상되었다. 내가 영화관에 간 이유는 '유명한 영화'라고 소문을 듣고 갔다. 이후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라는 용어가 궁금하여서 사위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메가박스로 안내해주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좀 의아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런데 옆에서도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 사위와 딸도 치고‘어럽쇼 이것 봐라.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영화관이 아니고 아예 ’퀸의 공연장’이었다. 딸이 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엄마, 공연장에 온 것처럼 해” 흥이라면 빠지지 않는 나다.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어 대면서 좌우를 돌아보니 다들 신이 나 영화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격세지감이 들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 시절 그러지 않았다.


   54년 전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이다. 단체 영화 관람이 학교에서 자주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을 인솔하였고, 교장 선생님도 가끔 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했다. 제목이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애가 타는 부분에서는 모두 하나 되어 발을 굴렀고, 반전이 되면 좋아서 박수를 치며 극장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한 번은 학교에서 제일 젊었던 여자 미술 선생님이 얼마나 나무라는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는 것은 무식하고 교양 없다는 뜻이라나.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영화라고 했다. 이후 숨소리만 냈다. 그러면 요즘 애들은 교양이 다 어디로 간 건가


   내가 전처럼 들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은 음악에 맞추어 흔들었지만 이내 가만히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감정조절이 내 뜻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분위기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장모님예, 일어나시소오~" 사위가 나를 일어나도록 부추겼다. 나도 좋았고, 사위와 딸, 아들이 한껏 흥을 돋았는데 장승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무엇이 관중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드는지 의문이 생겼다.


   주인공 프레디의 아버지가 ‘good thought, good word, good deed‘를 강조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입에서 고운 말이 저절로 나오며 또한 선한 행동도 스스럼없이 한다‘는 나만의 의미다. 나는 생각이 곧 말로 표현되며 행위 또한 올바를 수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지 못했을 땐 한 마리의 불나방이었다. 프레디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듯 나 또한 제도와 형식에 묶이지 않으려 감각적인 불빛을 찾아 헤맸다. 뿐만 아니라 팔랑귀만 있었다.


  남편이 최전방 대대장을 하던 시절에는 보름 간격으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휴전선을 감시하는 부대는 국가적 차원에서 대우가 남달랐다. 사단장이, 연대장이 사흘들이 격려해준다며 본부로 불러들였다. 나는 87년부터 노래방이 아닌 부대 회식장소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렀다. 먹고, 마시고, 떠들 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산 그림자가 내려 쌓인 캄캄한 산길,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알 수 없는 허무한 생각이 어둡게 밀려왔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항상 어깨가 무거웠고 속이 불편했다.


   최전방은 사방이 산이다. 외지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 세 번. 파란 하늘만 보이는 오지에서 불경을 독송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남편과 부대가 무탈하기를, 그러다 보니 연대가 강건해야겠고, 사단도 그렇고, 나라의 안위도,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였다. 나 한 사람의 기도가 뭐 그리 효험 있을까마는, 밤마다 남편의 앞날을 위해 시작된 기도는 신바람이 났다. 세계 만민이, 내 나라가, 남편이 현재 소속되어 책임지고 있는 부대원들이 강건해야 내가 편안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여전히 심신이 편안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한 원인을 찾고 또 찾았다. 프레디 아버지의 말씀이 어느 날 내게도 꽂혔다.


   생각이 바뀌니 말하려 하는 용어 선택이 달라졌고, 태도가 단정해지면서 나를 책임질 수 있는 행동으로 바뀌었다. 노래 부르는 것보다 듣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고, 소란스러운 장소는 멀어지고 조용히 사색할 곳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신명은 타고 난 사람이라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즉시 음률을 탄다. 나는 노래방 가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다. 반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한다. 밴드 ‘퀸’의 결성과 활동하는 모습, 일원의 보컬이자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

의 한평생 중 사랑과 천재성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나라 관객이 영국을 능가하여 전 세계 1위라고 했다

. 내가 두 번, 아들도 두 번, 사위와 딸은 네 번을 보면서 숫자를 높이는데 여러 번 보탰다. 객석이 처음 관람할 때는 조용했다. 대신 영화가 끝나도 가지 않았다. 퀸의 노래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딸과 사위, 아들, 관객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약 한 달 뒤 두 번째 관람은 초장부터 달랐다. 나의 자식들부터 다들 작정하고 모였던 것 같다. 손뼉 치는 것은 기본이고, 시쳇말로 ‘떼 창’을 거리낌 없이 했으며, 약속이나 한 듯 거의 일어서서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때 천장에서 '파도타기' 하듯 웅장한 소리가 파도를 탔다. 실제 공연 현장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면이 하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더 이어졌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은 내 삶의 지향점이다.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린 이후 부모님을 찾아뵙고 아버지 말씀대로 살겠다고 말했다. 건강을 잃었을 때 발견한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이 말을 꼭 한 번만이라도 짚고 넘어갔으면 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하여 진지해졌으면 좋겠다. 밴드 퀸은 ‘가족‘이란 용어로 결속력을 높였다. 가족의 구성원은 타인이거나 또는 자신의 가족이 '가족'의 상대가 되는 것이다. 구성원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기본 심성이 갖추어져야 하고, 그 문화가 저변을 메워가야만 된다. 그것은 좋은 생각부터 해야 하고, 좋은 말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였지만 세계적인 공연을 앉아서 단 돈 만원으로 최대의 행복을 누렸다. 꼭 공연장이어야 하는 법이 어디 있나. 나 또한 영화를 통해 즐거웠고, 새로운 용어나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최소의 투자로 최고 가치를 지녀보는 시간이었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6월 19일 저녁 7시 56분에 찍은 노을이다. 이 글의 도입부를 쓰지 못해 몇 날 며칠을 서성이다 오늘에야 쓸 수 있었다.


아래 사진: 지난 4월에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하는 공연을 관람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사회적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너도 나도 조심하였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40356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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