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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n 03. 2021

주관이 강하시군요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서 결정을 못 하는 순간이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가 나를 위로해 주기 바라는 심정도 포함된 채. 그러나 상대는 매정할 정도로 차갑게 돌아서버린다. 마치 그런 것 하나 과감히 결단을 못 내리면서 어른이라고 하느냐는 듯. 그리고 모른 척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지독스럽게 냉정하게 굴었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의 술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둔했던 나는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손자는 어미의 젖을 먹었다. 아랫니 두 개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나오더니 앞니와 송곳니까지도 앞섰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가 까맣게 보여서 어멈이 충치인 줄 알고 속을 태웠다. 답답해하던 어멈이 치과로 갔다. 의사는 젖 먹는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돌도 되지 않은 아기 입에 기계를 들이대고 드르륵~ 손자가 기겁해서 뒤로 자빠지고, 한바탕 소동으로 진땀이 좌악. 이후 딸 내외는 강제로 아이를 붙잡아 칫솔질을 하니, 손자가 온 지구를 떠들썩하도록 만들었다. 19개월이 되면서 다시 치과에 갔더니 까만 그 원인을 모른다는 답변만 들었다. 아이는 그날도 병원을 훌러덩 뒤집었다.


  손자의 비명을 들으며 나의 소싯적이 생각났다. 삼십 대에 어금니 하나를 발치하였다. 충치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의사의 상술이자 심리전에 걸려들었다. 내가 무섭다고 했더니 "그럼 뽑지 마세요." 의사가 심드렁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환자에게 가버렸다. 나는 어금니 뽑는 시기를 놓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서 뽑겠다고 과감하게 말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뽑혔다. 또 몇 년 뒤 반대편 어금니마저 뽑았다. 치과 의사는 어금니는 뽑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사실 생활하고 음식을 먹는데 이상이 없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달력 한 장 한 장이 시나브로 뜯겨 나갔다. 그 달력이 눈 내리 듯 가슴까지 쌓였다. 세월이 지나가는 치아 계곡의 사잇길은 넓어지기만 했다. 치아 골짜기에는 낙엽과 부엽토가 켜켜이 쌓였다. 얼음물이 흐르면 치아 계곡은 밤새 찬바람으로 몸서리를 쳤다. 치아 골짜기의 나무들이 뿌리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치아 계곡을 유지하던 밝은 색 토양들이 씻겨져 내려갔던 것이다. 아름다웠던 치아 골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치아 골짜기에는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을 뿐이다. 


  '이가 솟구친다.' 내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몇 날 며칠 많은 생각을 골똘히 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위 고민이나 신경을 많이 쓰면 으레 밀고 들어오는 장기 투숙자였다. 투숙자는 잊지 않고 연례행사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풍치'라면서 괴로워하였다. 입 냄새 또한 심각했다. 이가 저절로 빠졌다. 어머니의 공포가 내게도 40대부터 엄습하였다. 닮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냥 넘어가도 좋으련만 환경적 요인들은 치아 계곡으로 먼저 파고들었다. 


  치과의사들은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라고 했다. 나는 치과 가는 것이 무척 두려웠다. 잇몸이 약해지면서 계속 헐었고, 피가 나왔으며 아랫니 잇몸이 내려앉아 치아 뿌리가 보였다. 의사는 다시 치과를 방문해야만 하도록 대충 치료해주었다. 나는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갖은 궁리를 하였다. 그 결과로 잇몸을 치아처럼 칫솔질해보았다. 잇몸은 치아를 유지하니 칫솔질로 혈액순환이 잘 되면 튼튼해질 것 같은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꾸준히 해 본 결과 희망이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치석은 매년 제거해야만 했다. 내가 사는 동네 의사는 나의 코 앞에 치주염이나 치은염으로 검붉게 변하여 잇몸이 내려앉거나 이 사이가 십 리나 벌어지고, 곪아 터져서 보기 흉한 모니터를 보이도록 해두었다. 왕년 같았으면 징그러웠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의사의 상술을 비웃었다. '흥!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니' 눈을 감았으면 감았지 화면을 쳐다보지 않았다. 의사가 권하는 시술에 대하여 나는 정중하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답변을 했다. 나의 말투에 의사도 내게 말하는 어투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60 초반에 의사가 또 어금니를 뽑으라는 것이다. "안 뽑으면 어떻게 되지요?" 의사는 간단한 설명을 했다. 나는 이를 뽑을 경우 젊을 땐 괜찮았으나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 사이가 벌어진다고 하였다. "주관이 강하시군요." 하면서 의자를 돌렸다.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해보라며 옆의 환자에게 몸을 기울였다. 긴 의자에 누운 채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어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너의 상술에 속을 것 같으냐'면서 나도 털고 일어서버렸다. 계산대에 갔더니 접수하는 아가씨가 다시 생각해서 예약전화를 하라고


  유명한 치과의사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근래 동네 가까운 곳으로 치석 제거하러 갔다. 의사가 "치아관리 잘하였다"면서 내게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간호조무사가 치석제거를 해주었다. 요즘은 그런다고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면 나 같은 사람은 의사의 인격이 마음에 들어서 다른 병원을 찾지 않는다. 의사들이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는다.


  의사는 주관이 강해도 되나. 환자는 의사에게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 지금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굉장히 소중하다. 상대도 그의 입장에서는 '나'다.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제삼자도 개인(個人)이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各者)이며 각각이다. 각자 전부는 소중한 존재들이므로 서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며칠 전 사돈과 점심식사를 하였다. 돼지갈비를 먹으며 치아 계곡에 눌러앉는 것이 느껴졌다. 먹으면서 이 사이를 찔러 댈 도구를 찾았다. 연신 혀로 밀어내었지만 그 찝찝함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앞에 앉은 사돈의 눈치를 봐가며 치아 계곡의 퇴적물들을 제거할 기회만 노렸다. 오래전 어느 날 아들이 입을 가리는 나를 보고 "엄마, 제발 쪼~옴~" 나는 아들 보기 겸연쩍었지만 "니도 내 나이 대바라."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청도 운문사 들어가는 길. 나무들은 듬성듬성 떨어져서 자라야 잘 자란다.


아래 사진: 봄이 11층 아파트까지 밀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손자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 밤마다 사위에게 붙들려서 양치하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울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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