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화병

by 정 혜




종로를 거닐다 다구점(茶具店) 앞에서 길을 멈추었다. 물고기 형상의 여닫이 통 한 점이 긴 시간 전시되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얼마 전 범어 4거리를 지나면서 버스정류장 건물에 꽃이 핀 화분을 매달아 놓은 것이 보였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신선하게 느껴져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발길을 떼면서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다. 한동안 아버지를 기억하려고 글로 표현해본다는 계획을 잊고 있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곧 나의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내가 대구에서 2학년까지 살다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화원면으로 이사를 갔다. 화원 국민학교 사택에서 살 때다. 아버지는 학교 온실에 꽃이 넘쳐나도록 정성을 들였고, 집 안 뜰에도 화초가 빼곡했다. 여름날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지면, 아버지는 수업하다 말고 사택으로 달려와 화분을 마루와 뜨락에 옮겼다. 다 옮길 즈음이면 비가 그쳤다. 아니면 몇 개 나르지도 못해 해가 나왔다. 웃으면서 다시 화분을 화단 제 자리에 갖다 두고 교실로 갔다. 나도 여러 번 소나기를 홀딱 맞으며 아버지를 도왔다. 이런 일이 싫지 않았다. 대신 공부는 별로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버지 손만 한 물고기 모양의 하얀 도자기 한 점을 사 왔다. 사택이 두 간짜리 양철지붕이었는데 중앙 기둥에 아버지 머리보다 높게 못을 박아 걸었다. 그리고 물을 부은 후 꽃을 꽂았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대구 시내로 외출했다가 아버지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는지 주저하지 않고 즉시 화병을 샀다고 들었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는 것이었다. 꽃이 시들만 하면 새로운 꽃을 꽂는 것도 아버지 몫이었고 즐거워하였다.


화원 국민학교 행사에 참여했던 어떤 남자들이 우리 집 화단이 예쁘다며 둘러보고 갔다. 곧이어 아버지가 들어와서 화병이 없어졌다고 무척 당황해하면서 내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버지는 나의 이야기를 듣는 즉시 화원면 내 버스정류장으로 달리다시피 다녀오더니 이미 차는 떠나고 그림자도 못 찾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상심하는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좋지 않았다. 얼마간 안절부절 무척 심란해하였다. 애정을 쏟았던 물건이 없어진 뒤 공허함이 밀려왔던 것 같다. 지금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한 번은 유명한 온실 같은 곳에 견학을 가면, 곁가지를 떼 내어도 되는 식물은 슬쩍 뜯어내서 주머니에 넣어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꽃 도둑이나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하면서 웃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도 윗대 어른들께 듣고 배운 것이리라. 그러니까 나에게도 그렇게 말씀을 하였겠지. 소위 교단에 서는 아버지가 진짜 도둑질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몇 년 전 꽃이 핀 난분(蘭盆)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이때도 아버지가 생각났다.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 분명히 아니다. 나는 '남이 가져가라고 하지 않은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라고 수계(受戒) 했다. 그 난 분은 나의 사무실에서 그림 전시회를 하던 화가가 축하의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그녀도 상당히 황당하게 여겼다. 화가는 가져가라는 말 하지 않았으니 슬쩍 한 사람은 도둑이다. 말없이 들고 간 사람은 도둑질한 과보를 받을 것이므로 그를 나무랄 필요가 없다. 만약 내 물건을 가져갔다고 화가 나서 욕을 해대면 나 또한 구업(口業)을 짓는 것이고, 악업을 쌓는 일이라서 '오죽 가지고 싶었으면 가져 갔을꼬' 라고 생각을 바꾸면 된다.


꽃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은 애교로 눈감아 주라는 뜻인 듯. 지금의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강력히 말한다. 도둑은 주지 않은 것을 가져가는 것이다. 책과 꽃을 잃은 당사자는 과연 애교로 봐줄 수 있을까. 아버지는 화병이 없어지고 그렇게 황당해했으면서… 그리고 가져간 사람은 크든 작든 엄연히 도둑질이다. 도둑질은 5계 중 둘째 계를 범하는 것이다. 붓다는 오계를 잘 지킨 결과의 하나로 어느 회중(會衆)에 가더라도 경찰이 나 잡으러 올 일이 없고, 그 누가 멱살 잡고 늘어질 일 등이 없어서 매사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다고 했다. 또 어딜 가든 훌륭한 사람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다.


종로 한 가게 앞에서 아버지가 생각나다니. 나중에 그 다구점에 들어가 감상을 제대로 하고, 주인의 조언도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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