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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n 15. 2020

물은 먹고 싶은 사람이 샘을 판다

구부득고(求不得苦)


   초 초 촉! 촉, 초 촉! 초작.

  장맛비가 밤새 내렸다. 넓어진 모과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대지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나의 귀를 열리게 했다. "톡, 토 톡, 척, 처 척" 잠 못 드는 밤에 들어보는 비의 교향곡은 싱그러웠다. 비가 식물들에게 강약을 멋대로 하며 뿌려대는 빗줄기는 어딜 닿아도 조화롭다. 불협화음이지만 편안하였다.


  청개구리가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개굴 거리며 냇가로 달려가면서 목청껏 울어댄단다. 떠내려 가지 말라고. 나도 비만 오면 뒤 안의 상습 침수 지역이 떠오른다. 모과 잎이 되받아치는 넉넉한 빗소리의 감상이 끝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전히 교향곡은 울려 퍼지는 중이다. 내일은 꼭 가봐야지 벼르면서 잠을 청해 본다.


  아들이 내려왔을 때 모과나무를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부자가 함께 해야 빨리 끝낼 일이었다. 그것이 햇수가 쌓이고 있다. 지난 3월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청개구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의 아파트에 있었으므로. 내 집에 와서 뒤 안으로 가보았다. 아니 다를까 침수가 되어서 나를 어서 오라 반겼다. 아마 냇가 같았으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자는 방에는 한 점 풍경화가 사계절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은 창문을 열어 두면 초록이 우거져 눈이 편안해진다. 가지가 멋스럽게 늘어져 방충망에다 손전화기를 바짝 붙여서 사진을 찍어도 멋지다. 초록은

마음이 시원해져서 남의 것이지만, 풍경화는 내가 아끼는 작품이 되었다. 요즘은 모과가 겨우 암술을 떼 내고 몸집을 불리느라 여념이 없는 때다.


  툭! 투르르륵 득. 똑 또그르르르.

  흠칫 놀라서 머리를 들었다. 또 떨어지기 시작하네... 모과가 줄기마다 총총이 매달렸다. 열매가 커지기도 전에 굵은 가지들이 축, 축 처져 있다. 애고, 저 자잘한 열매들이 떨어지면 좁은 하수구 다 막힐 텐데... 그래도 계속 소란스럽게 표시를 냈다. 비 오기 전에 뒤 안 낙엽 치워야지 하면서 잊어버린다. 그곳은 허리를 90도로 수그려서 드나들어야 하며, 내가 돌아 설 수 있는 정도의 폭이다. 길고양이 드나드는 꼴 보기 싫다며 남편이 협소한 출구를 봉쇄했다.


  저 모과 열매가 끊임없이 낙과하고 있다. 더 자라기도 전에 스스로의 가치를 알아서일까. 낙과(落果)는 만유인력 때문일까. 자연도태하는 것이겠지. 모과는 최후까지 남는 열매가 모과로서의 노란 면모를 갖추는 약낙강과(弱落强果)의 결정체였다. 묵은 나무가 되어가니 낙엽 또한 많았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더 기다려야 하나. 물은 먹고 싶은 사람이 샘을 판다. 비가 내리는 오전에 좀 큰 비닐로 몸을 감싸고 우산을 들었다. 


  낙과는 강한 모과를 위해 스스로 택하는 길이다. 찬 서리 내릴 때까지 낙화암의 삼천 궁녀가 되는 것이다. 소정방이나 김 유신 장군의 전리품이 되어 전공자들 방에 배분될 것이다. 그래, 잠시 삼천 궁녀들 시신이나마 고이 모셔드리자. 백마강 물이 궁녀들과 함께 서둘러 빠져나가고 있다. 승리자들의 손에 들어가기 전, 미리 물길 따라 떠나는 것도 수치심을 느낄 여유가 없을 것 같다.


  샘 파는 것은 강물로 대신했다. 구부득고(求不得苦)다. 내가 원하는 것이나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괴롭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래전 어느 날에 구역질이 시작되었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리고도 계속 구토가 이어졌다. 나중에는 헛구역질만 나왔다. 의사가 "무슨 신경을 이렇게 많이 써요?" 낙과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 있나. 살 만큼 살았으니 떠나는 것이지. 낙과는 단순했다.


  늦은 가을이면 나목만 남았다. 봄부터 온 여름내 무성한 잎으로 모과를 키웠다. 그리고 훌훌 다 벗어버렸다. 나는 이제야 풍경화가 내 곁에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는 그동안 함께 하면서 무수한 모과 잎처럼 욕심을 부렸다. 저리 무성한 번뇌에 휩싸여서 몸부림쳤다. 결국 나목이 되는 것을.


  비가 그쳤다. 청명한 날이다. 다 떨치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그래. 나갔다 오자.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00185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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