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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n 21. 2020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를 읽으며 5

나르시시즘(narcissism)

   에코(Echo)는 숲의 요정이다. 소문난 수다쟁이다. 하루는 헤라가 남편 제우스의 불륜현장을 추적하다 에코의 수다에 한눈을 팔게 되었다. 정신을 차린 헤라가 에코를 저주하며 남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혀를 놀릴 수 없고 말대답만 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미남 청년 나르키소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에코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르키소스에게 실연을 당한 후 죽고 만다. 대신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미남 나르키소스(Narkissos)는 강의 신 케피소스(Kephisos)의 아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미모가 뛰어나서 장님 예언가가 나르키소스는 본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산다고 예언했다. 케피소스 내외는 집안의 거울을 모두 치워 나르키소스로 하여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게 차단했다.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요정들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자, 요정들은 그에게도 짝사랑의 아픔을 알게 해달라고 신들에게 요청하게 된다. 복수의 여신이 응답한다. 나르키소스가 홀로 사냥 갔다가 목이 말라서 샘물을 찾는다.
수면에 잘 생긴 사람을 보고 샘의 요정이라 생각하며 사랑에 빠진다. 식음을 전폐하고 샘의 요정만 생각했다. 에코와 같은 상사병으로 죽어갔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 이름이 수선화(narcissus)다. 


  "나르키소스는 저승으로 건너가는 스틱스 강을 지나면서도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굽혔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에게 지독한 사랑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나르키소스의 운명에서 '자기도취증'을 뜻하는 심리학 개념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비롯된다."


  "과도하지 않은, 절제된 자기 사랑은 자신감, 자존심, 명예 의식, 희망, 이상을 낳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지나치면 병적인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대상 앞에서 자기를 지나치게 드러내기도 하고, 지나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전자는 '파괴형 나르시시즘', 후자는 '리비도(기본적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적욕구로 성본능, 성충동을 뜻함) 나르시시즘'으로 각각 분류된다." 

  메아리와 수선화의 그리스 식 전설이다. 나르시시즘을 읽으면서 붓다의 가르침인 중도(中道)가 연상되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짝사랑은 메아리와 수선화만 피었다. 어떤 주제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이야기가 전개되니 어쩔 수 없이 비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나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당연히 신화의 인물이 아니어서 중도가 떠올랐다. '과도하지 않은, 절제된 자기 사랑은 자신감, 자존심, 명예 의식, 희망, 이상을 낳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며, 정신분석학에서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했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삶을 중도적인 삶이라고 한다.


  중도적인 삶은 바로 볼 줄 아는 것이 최우선이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배제된다. 이것이 나르키소스의 미래를 좌우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시작부터 삐딱했다는 말이다. 사물을 바로 보면 생각 또한 반듯해지고 바르게 사유가 가능하다. 그리고 바르게 말을 한다. 바르게 말을 하면 이어지는 행동들이 모범적이다. 나르키소스가 사냥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목이 말라 샘을 찾으면서 바로 볼 줄 모르는 눈은 자신을 샘의 요정이라 착각한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으니 당연히 다음 단추도 어긋난다. 어긋난 것을 깨달으면 즉시 멈추고 채운 단추를 풀고 다시 맞추어야 정상이다. 늦다고 하는 그때가 결코 늦은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 늦게 도착할 따름이다.

  에코나 나르키소스는 삶의 극단적인 부분에 매달려 허망한 메아리만 울렸을 뿐이다. 중도적인 사고를 했더라면 오늘날 나는 산에 가서 "야호"를 아무리 크게 외쳐도 메아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산은 골짜기가 깊고 높고 얕은 봉우리들이 많다. 그래서 내가 질러댄 소리는 맞은 편 산봉우리에 부딪혀 되돌아오며 야호가 나를 감싸안고 귀에 속삭일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사고 대신 중도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 한때는 아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폭이 넓지 못해 '고지식하다'는 말을 내 어머니로부터 많이 들었다. 아는 것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잘났다고 어머니에게 많이 대들었다. 참 한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필사한 아래 문장은 꼭 나를 두고 저자가 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역설적이지만, 예언을 피해 가기 위하여 주변의 거울을 모두 치워버린 조치가 오히혀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거울은 타인의 시각으로 자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주관에 함몰되는 것을 방지하고 객관화를 실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자신을 거울에 비쳐 볼 기회를 갖지 못한 나르키소스는 객관화의 길을 상실하고 주관 속에 갇혀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에 대한 철저한 무지로 귀결된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 붓는 수다쟁이 에코도 일종의 나르시스트다. 그녀는 자신이 항상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말대답'으로 제한시킨 헤라의 저주가 시사적이다. 그것은 주관성의 상실을 뜻한다. 에코는 남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그녀는 타인에게 철저히 종속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주관성의 상실,  타인에게 철저히 종속된 상황에 빠져 있는 삶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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