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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l 03. 2020

병상에서 배우다

아름다운 마무리 12

  "모든 일에는 그 때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삶의 매듭들이 지어진다. 그런 매듭을 통해 사람이 안으로 여물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 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지내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면 내 몸이 아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내 몸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앓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와 따뜻한 손길이 따르는 것을 보면 결코 자신만의 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앓을 때는 혼자서만 앓는 것이 아니라 친지들도 친분의 농도만큼 함께 앓는다. '이웃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웃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이 뜻을 오늘에야 제대로 알았다. 작가는 '흔히 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지내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면 내 몸이 아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라고 적었는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스님이었으므로 내 몸이 아니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일반인들은 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더 집착한다. 나도 붓다의 가르침을 오래 배운 후에야 내 몸이 아니라는 집착에서 벗어났다. 태어나면 죽는 것은 당연하고, 내 몸에 병이 들어 아픈 것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 중 무아 상응경(無我相應經)은 5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설하는 경이다.


  "비구들이여! 물질[색(色)]은 무아(無我)다. 만일 물질이 아(我)라면 질병으로 인도되지 않을 것이고, 이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물질은 질병으로 인도되고,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색(色)]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대덕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이 현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대덕이시여! 확실히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 어떤 물질[색(色)]이라도 그것이 과거이건, 미래이건, 현재이건, 안이건, 밖이건, 거칠건, 섬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모든 물질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paññā로 보아야 한다."


⁠   위의 문장에서 '비구들이여'를 빼고 읽어도 된다. 물질은 우리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아(我)는 '나 아(我)'이므로 '나'로 바꿔서 읽어보면 '나는 없다(無我)' 그 이유는 '이 몸뚱이에 대해 ‘나의 육신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몸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물질은 질병으로 인도되고,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을 되씹어서 의미를 생각해보면 서서히 내 몸에 대해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문장은 육체를 물질로 분류하면서 물질인 육체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五蘊)이다. 오온인 내 몸(色)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색(色)]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이 현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확실히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나는 이 문구를 읽을 적마다 영어의 'I, my, me'가 생각난다. '나, 나의, 내 것'이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붓다는 영원한지 무상(無常: 항상 하지 않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 한 것인지 제자들에게 질문을 했더니 다 항상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확실히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못 박았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세상만사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런 분의 말씀을 믿고 따라서 실천해보니 세상 사는 맛이 난다. 이 좋은 가르침을 모를 때는 소화제는 상비약으로 대기상태였으며, 온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집착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단순해졌다. 또 건강해졌다.


 내가 필사한 문장은 


  "병상에서 줄곧 생각한 일인데 생로병사란 순차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자연사의 경우는 생로병사를 순차적으로 겪지만 뜻밖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죽음은 차례를 거치지 않고 생(生)에서 사(死)로 비약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삶이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 인생을 하직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이 되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언제 어디서나 삶은 어차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순간들을 뜻을 뜻있게 살면 된다. 삶이란 순간순간의 존재다."


   '어차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순간들을 뜻을 뜻있게 살면 된다.'를 '어차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순간들을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행동하는 삶이어야 된다.'라고 고쳐서 써야 불교다운 문장이 된다. 두리뭉실한 문장 표현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독자들은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신행(信行)의 글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02045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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