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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l 04. 2020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라틴어 수업 7

  작가 한 동일 교수가 2005년 한 때 건강이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한 교수의 은사이신 한나 알안 주교께서 한국에 오셨다가 2007년에 주교의 고국인 레바논으로 한 교수를 초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레바논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헤즈볼라 대원들이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을 죽인 것이  빌미가 되어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 공항까지 폭격을 하여 초대를 긴급히 철회하였다. 그렇게 하여 지인 부부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평소 이슬람교나 기독교도들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왜 벗어나지 못할까, 그들이 말하는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신은 없는데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는지가 궁금했다. 작가는 나와 다른 의문점을 표현하여 그 문장을 필사하였다.



  ⁠"사실 전부터 사막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왜 신에 대한 믿음, 즉 신앙은 풍요로운 땅보다 사막과 같이 거칠고 메마른 땅에 그렇게 쉽게 뿌리를 내리고, 또 뿌리를 내렸다 하면 그렇게도 깊이 뿌리 박히는지 궁금했어요.

아마도 사막의 자연적인 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겁니다. 사막을 여행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막 한가운데 섰을 때 인간의 시선이나 생각을 가로막는 인위적인 장애물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인간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인간은 절대적인 나약함 속에서 절대 자연의 무한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만 듭니다. "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로마에서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한 점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로 구법여행 떠난 비슷한 처지를 공감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타클라마칸 모랫길을 걸으며 쓰러졌다고 한다. 인공호흡으로 의식을 되찾아 가마꾼의 가마를 타고 인근 시골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안정을 되찾았다. 호텔에서 머물며 그동안 살아온 한 교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늘에 갔을 때 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할까?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몇 날 몇 시에 내가 저질렀던 인간적인 실수들과 교회가 말하는 죄를 읊으며 나를 판단할까?' 하지만 저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제 기억을 기준으로 물어볼 것 같았습니다. 이 땅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불편하게 품고 간 기억과 아픔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 같았어요."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18장 18절 말씀입니다. '내 기억을 정화시키자'고 결심했습니다.

나쁜 기억을 품고 가기보다, 차라리 그냥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Dilige  et  fac  quod  vis.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아우구스티누스의 『페르시아 사람들을 위한 요한 서간 강해』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로마로 다시 떠나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작가는

 


"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만큼이냐고요. 하지만 신은 침묵으로 답하겠죠. 누구도 자기 생의 남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또박또박 살아갈밖에요. "




  나는 오늘 매달 첫째 토요일에 법회가 있는 선원에 다녀왔다. 스님의 법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내 마음을 관찰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과 결과를 알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 변하는 그 마음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자꾸 달라지는 그 마음에 붙들려서 집착하지 말고 벗어나라고 했다. 어제 아름다운 마무리 서평에서  '이 몸뚱이에 대해 ‘나의 육신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몸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인 내 몸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물질은 질병으로 인도되고,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나는 이 문구를 읽을 적마다 영어의 'I, my, me'가 생각난다. '나, 나의, 내 것'이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상(無常: 항상 하지 않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하고 괴롭고 변하는 이 현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질문을 했더니  확실히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집착하며 살고 있다. 붓다는 우리들에게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신은 침묵으로 답하겠죠."  침묵으로 답한다는 것은 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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