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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l 18. 2020

얼굴을 묻었다

  월요일 오후 낮잠 자는 손자를 지키고 있다. 이 녀석은 자는 중간에도 누가 있는지를 꼭 확인하였다. 일요일 어젯밤 9시가 넘어서 딸의 출근을 돕기 위해 아파트로 왔다. 그 밤에 손자가 자다 말고 달래지지 않는 울음으로 떼를 썼다. 지 어미가 아주 오랫동안 서성이더니 조용해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5시 30분쯤부터 옹알이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일어나기도 전 참으로 부지런한 내 손자다.


  나는 첫 아이가 쌍둥이다. 친정어머니께서 내가 고생한다며 가끔 한 녀석을 돌봐 주었다. 손자의 어미는 돌이 지나자  대구 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의 근무지 서울에서 있었다. 나는 나이만 먹은 초보, 그것도 쌍둥이 엄마였다. 아이의 마음은 한 번도 생각할 줄 몰랐다. 육아로 지쳐서 그저 나의 심신이 힘든 것, 또 여유 없는 살림살이가 나의 어깨를 짓눌러 도피처를 찾기 바빴다.


  동대구 역에서 친정까지 걸었다. 어머니는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손녀를 걸려서 동네 어귀로 마중 나오셨다. 딸을 보는 순간 '나를 알아볼까'라는 의구심이 들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를 알아본 딸이 "엄마" 힘없이 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내가 안고 있던 녀석을 어머니에게 안기고, 나는 허리를 굽혀 아이를  덥석 들어 안았다. 그동안 내 몸은 좀 편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그늘져 있었다.


  손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미 배를 두 발로 기어올랐다. 문득 딸이 내게 달려와 안기는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떠올랐다. 손자가 나와 잘 놀았지만, 지 엄마가 없는 안방이 허전했던지 기어서 그냥 돌아 나왔다. 짠한 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딸이 첫날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었을 때, 손자가 내게 업혀서 잠들려던  설핏 들리는 어미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찾기 시작했다. 손자 재우기를 포기하고 어미에게 안겨주었다.


  손자가 어미에게 안겨서 마치 "왜 종일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어요."라며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내가 떼어놓았던 딸의 자식이 원망스러운 감정을 울음으로 쏟아내었다. 악을 쓰다, 흐느끼다, 또 서럽게 울고 보채다가 잠이 들었다. 그저께 출근 3일째 깊은 밤에도 사오십 분을 자지러지게 울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린 내 딸에게 안겨준 고통이 밀려와서 가슴을 후벼 팠다. 딸이 안고 있는 손자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아이를 달래다 돌아섰다.


  세 식구는 잠이 들었다. 나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깊이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돌잡이 딸은 떨어져 있으면서 나의 부재를 손자처럼 느꼈을 것이다. 어리석은 나는 어린 것의 마음을 이제서 알아차리고 있으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진심으로 미안하다. 아무것도 몰랐단다."


  내 딸이 집착하는 원인을 손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딸은 모유수유를 돌까지 고집하고 있다. 나는 젖이 부족한 데다 쌍둥이여서 어머니가 분유를 권했다. 그래서 어른의 말씀을 따랐다. 역시 내 딸도 모자랐지만 억척스럽게 노력했다. 쉽게 아기를 키워도 되는데 저런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후풍으로 고생할까 그것도 걱정이 되었다. 딸은 젖을 먹지 않았고, 나와 떨어져 있었던 그 잠재의식이 작용한다고 짐작했다. 모유만 먹던 손자는 체중이 눈에 뜨이게 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젖양을 늘이기 위해 늦은 밤에도 유축을 했고, 5개월이 지나도록 매일 미역국을 먹었다.

  

  

  손자가 지 어미 옷에 엎드렸다.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며 어미를 그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느끼지 못하는 어미의 냄새를 맡으며 얼굴을 묻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앞섰다. 나는 내 자식을 잘 키운다고 노력했지 싶은데 손자를 돌보면서 저질이었다는 자괴감을 버릴 수 없다. 삼 남매가 잘  커준 것만으로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위한다.  


  내 딸은 근무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손자가 10개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출근을 서둘렀다. 아이의 엄마 자리를 대신하는 내 가슴이 이리 미어질 줄 몰랐다. 짐작이야 당연히 했지만, 당면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싫고 좋음을 확실히 구분하여 소리로, 행동으로 표시했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손자의 두드러진 인지능력이 한 뼘 자라나 있었다.


  딸은 공무원 6급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내가 몇 년 전 용돈을 벌어 볼 요량으로 두 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이미 그때 60이 넘었지만, 사장이 나이를 가리지 않아서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해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지만 나이가 번번이 퇴짜를 맞도록 했다. 경력단절녀의 어려움을 그때 느꼈다. 육아휴직을 미룰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기회는 그 때가 있는 법, 복직을 말릴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다.  


  딸이 아기를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럴 형편이 안된다는 것은 핑계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맞벌이를 하면서 잘 키우는 부모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맞벌이 가정은 아이들에게 문제점이 많다. 전업주부의 가정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덜 먹고 덜 쓰는 방법을 선택하면 좋을 것 같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식의 안정된 정서함양과 인성교육이 우선이다. 그러나 젊은 엄마들은 육아가 싫어서 자식을 맡기고 직장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내 딸도 아기는 예쁜데 키우기가 힘이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딸은 승진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나 또한 경력이 단절된 채 사는 것보다는 활동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사람이다. 막상 내 손자가 어미의 부재를 보면서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는 시간이 되고 있다. 어차피 시절이 이러하거늘, 내가 손자의 어미로 인해 비워진 자리를 충만한 마음으로 채워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 바르게 언행 하려 노력하는 할머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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