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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Aug 08. 2020

시절 일기를 읽고

  7월 한 달 동안 읽은 '시절일기'는 펴낸 곳이 '레제', 작가는 김 연수 님이다. 1판 1쇄가 2019년 7월 22일, 1판 6쇄가 2019년 11월 18일.

처음에는 이 작가가 여자인 줄 알았다. 단체 카톡방에서 놀람의 소리가 들려서 그때 책을 펼치니 정말 남자였다.  년 월일을 일렬로 나열하지 않고 별자리로 적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롤로그에서 불교 경전인 『로히땃사경』이 먼저 등장하여 작가 덕분에 로히땃사경을 살펴보았다.


1. 핵심 태그 5가지


 #내가 쓴 글,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 #이별은 노래가 된다, #나의 올바른 사용법,  #사랑의 단상



2. 마음을 건드린 핵심 밑줄 긋기


   17쪽.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일기의 목적이 쓰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28~29쪽. 나이 들면 모든 소설이 아니라 어떤 소설들이 읽기 싫어진다는 얘기다. 이젠 다는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자는 긍정적 태도가 생긴 것이다.

  38쪽. '가족이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 안에 들어온 꺼림칙한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을 교환하기 전, 두 가족은 서로 상대방의 아이를, 아들이 아닌 아들을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영상은 없을 것이다.

  70쪽.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어느 날, 우리에게 바람이 부는 저녁이 찾아오리라. 그때 우리는 가만히, 그저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문득 그 바람이 자신에게는 단 하나뿐인 바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194쪽. 공포 담은 실재를 대면하지 않고 조악한 재현에 의존하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억압하는 것들을 그 조악한 재현에 투사하고는 그게 마치 실재인 양 바라보는 일까지 생긴다는 것도 세계와 나 사이에는 화면이 존재한다. 그 화면은 조악하다. 모든 공포 담은 그 조악한 화면을 실재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덧댄 상상의 거울과 같다. 그 거울을 깨면, 아마도 현실이 보일 것이다.

 209쪽. 음(音)에서 의미를 제거하면, 즉 화음을 제거하면 '심리적' 환영이 사라지면서 소리의 현존이 드러난다.

 210. 텔레스크린은 실재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 들려주는 식으로 사람들이 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일을 막는다.

 211. 마치 백남준의 TV로 수많은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그렇게 해서 백남준의 TV는 이 세계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TV, 즉 젠 마스터(Zen Master, 선사(禪師) TV가 됐다. 젠 마스터 TV에게는 자아가 없다. 젠 마스터 TV는 거울과 같다.

220.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3. 책을 읽고 느낀 점


  김 연수 작가님의 탄탄한 글 실력, 깊은 사유가 무척 부럽다. 나는 이 책을 지루하게 억지로 읽었다고 표현하면 정확하지 싶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문체이다. 그래서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벌써 포기했지 싶다. 겨우 읽으면서도 작가의 박학다식한 읽을거리에 배울 것이 많아 줄을 그었다.

21쪽의 "잇사라면 천진스러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하이쿠를 영역한 로버트 블라이도 '잇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개구리 시인, 가장 위대한 파리 시인이며, 그리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아동 시인일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나는 김 연수 작가를 통해서 훌륭한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 남준 씨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왜 지루했을까. '시절일기'라는 제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느 밀도 높은 고찰의 글은 작가와 함께 서재를 벗어날 수 없는 세월이 있었다. 그 세월은 세월호 사건과 결부되어 바닷속에 잠겨서 작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또한 심해를 헤쳐 나올 수 없었으나,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작가와 일기도 빛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호흡하기 곤란했건만, 시절일기는  많은 읽을거리를 대입하며 한 시절 동안 있었던 과거사를 조심스레 들추어내면서 은근슬쩍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작가는 책을 발간하면서 그동안 가슴앓이하며 속내를 감춰야만 했으나, 지금은 하고 싶은 바른말을 에둘러했으니 소설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암시로 소설로써 대미를 장식한 것 아닐까 추측했다.

나도 시절일기를 읽는 내내 미로를 벗어나지 못해 책을 덮고 펴기를 여러 차례 했다.


 '고전 격파하기' 이런 양질의 독서모임은 꼭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이 책을 통해서 느낀 것이 아니라 토론을 들으면서 다수  발표자들의 의견이 오히려 깨우침을 주었다. 토론을 통해서 내가 책을 읽으며 지겨운 이유를 알았다. 그런데 시절 일기를 통해서 나의 일기를 수필처럼 써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웃기는 일이 있다. 토론하는 날 손자를 재우고 ZOOM을 통해 내 잠자리에서 누워 들으려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다음 내가 참석했다는 '확인'을 눌렀다. 토론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되어버렸다. 끝날 때까지 내 이름을 또 부를까 십년감수하며 쥐구멍을 찾았던 밤이다.


 
4. 핵심 밑줄에서 질문 발견하기


247쪽. "불교 경전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도입부가 그 전형적인 예다. 이 관용적 표현은 누군가 암송하는 부처의 말을 순차적으로 받아 적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때 암송하는 사람과 받아 적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든, 받아 적는 사람은 자신이 적는 말을 입으로 되뇌었을 확률이 높다."



5. 질문에 답하기


 이 관용적 표현은 누군가 암송하는 부처의 말을 순차적으로 받아 적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때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대승불교가 꽃을 피운 중국에서 번역한 말이다. 대승불교는 붓다 사후 500여 년이 지난 후 중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고대 인도는 붓다 재세 전후로 그 가르침을 한 자도 빠짐없이 통째로 외웠다. 인도에는 암송하는 문화가 지금까지도 있다고 한다. 가장 좋은 예는 붓다 사후 100일쯤 그 가르침의 유실과 변형, 교단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마하 깟사빠 장로가 합송(合誦) 결집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제1차 결집 때 마하 깟사빠(대가섭) 및 500명의 장로(長老)들이 모였다.


  결집은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을 함께 합송 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500명의 빅 쿠들이 함께 공인하는 작업이다.



부처님은 법을 말씀해 주실 때 한 곳에 머문 것이 아니라 법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찾아가 법을 말씀해 주셨으므로 각자가 들은 설법이 달랐다. 이것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한 작업이 바로 결집이며, 이러한 결집을 통해 경전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500명의 장로들은 경(經, 붓다의 가르침)과 율(律, 빅쿠들이 지켜야 할 계율.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먼저 합송 해야 합니다. 마하 깟사빠 장로는 그럼 누구를 지주(支柱)로 삼아야 합니까? 499명 빅쿠들의 대답은 '우빨리 존자'라고 대답합니다.") 중 율을 먼저 합송 했다.>



  경은 중국에서 법(法, 또는 敎法)이라 번역했다. 「아난다 장로를 지주로 삼자는 빅쿠들의 추천으로 마하 깟싸빠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범망경 …>의 기원, 사람과 문제도 질문하였다. 질문할 때마다 아난다 존자는 붓다에게 들은 대로 풀이하였다. 풀이가 끝나면 500명의 아라한들이 함께 암송하였다.」



부처님을 가장 오래 시봉한 아난다 존자는 경장(經藏)의 결집을 맡았다. 이렇게 정리된 내용을 아라한들이 합송 하여 최종 확정하면서 교단의 근간이 되는 경장과 율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붓다는 외우는 것을 한 번이 아니고 무려 세 번씩 반복했다. 이해하고, 확인하면서 외우도록 되풀이했다. 배우는 제자나 재가자도 이해하고 확인하며 외우고난 뒤 암송하였다.  


3차 결집 때 경전이 문자화 되는 시기이며 아쇼카 왕(B.C 268~232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으로 등극)이 주도로 이루어졌다.


4차 결집은 쿠샨왕조의 카니슈카 왕의 후원으로 경율론 삼장(三藏)이 만들어졌으며, 이때부터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처음부터 '부처의 말을 순차적으로 받아 적은 것이 아니다.'를 말하고 싶어서였다.


부언하자면 함께 하는 '똑독' 회원들이 불교를 조금이라도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유자꽃이 연일 내리는 비에 흠뻑 젖었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05483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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