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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Aug 05. 2020

"애기 머리에서 꾸릉내가 나는 데요…"

   딸이 복직한 후 내가 손자를 목욕시킨다. 시킨다는 표현보다 함께 한다가 정확하겠다. 먼저 손자 입은 옷부터 벗겨서 욕조에 세운다. 그리고 손자 보는 앞에서 훌렁훌렁 나도 벚어젖힌다. 지 어미가 하도 부끄럼 없이, 또 감추려 애도 쓰지 않고 탈의해서 보고 배웠다. 그리고는 내가 물 분사기로 온 몸과 얼굴에 골고루 물로 적시는 것을 손자에게 보여준다. 녀석이 아직 세게 뿜어대는 물소리는 무서운지 얼른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루는 손자가 욕조에 앉은 어미의 시커먼 음모가 신기했는지 엄지와 검지로 만졌다. 딸은 "엄마 털이야. 나중에 너도 생길 거야." 거리낌 없는 대답에 약간 놀랐다. 자연스러운 성교육이었지만, 나는 아직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자는 어미에게 매달려 젖을 빤다. 모유를 먹이는 장점이기도 한 장면이었다. 어미에게 마음껏 응석을 부리고 받아주는 교감의 시간이기도 했다.


      손자는 백일이 지나면서 소똥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다. 딸은 그냥 두면 저절로 없어지더라는 내 말에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는 듯. 그런데 내가 이 녀석의 머리를 감길 적마다 하지 말라고 빽 빽 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왼 손 엄지와 검지로 손자의 두 눈을  지그시 누른 상태로 분사기에서 나오는 물을 약하게 하여 머리 가까이 대고 흘러내리게 한다. 내 아들이 이내 적응하는 것을 보았기에 좀 우악스럽지만 손자도 밀어붙이는 것이다.


      1988년 2월 강원도 오지 군인관사에서 나의 아들을 낳았다. 건물 한 동에 두 가구가 사는 구조였다. 마침 옆집에 사는 이가 임신 중이어서 내 아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모년 모시 그녀가 내 아들을 품에 안고 요모조모 구석구석 뜯어보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뒤적이면서 냄새까지 맡았다. 속으로 '저 여편네가 별 짓을 다 하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애기 머리에서 꾸릉내가 나는 데요…" 옆집 여자가 겸연쩍게 웃으며 코 위에 걸쳐진 안경을 올리면서 말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매일 오전에 목욕시키는 아이를 마치 몸도 씻기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니.


      남편의 지휘관 임기가 끝났다. 나는 서울에 살면서 옆집 마누라의 해산 날을 기다렸다. 꼭 되갚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앞으로 매단 채 강원도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서 나도 그녀가 한 것처럼 되풀이했다. 그리고 "얘도 머리에서 냄새가 나네~" 이 마누라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 아들 생각을 했어요. 호호호…"


      사실 아들의 머리 냄새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맡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래되어서 내가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손자는 소똥이 다른 아기에 비하면 부위가 아주 작다고 의사가 말했다. 아들의 소똥 내는 못 맡았지만, 손자는 매일 안다 보니 땀 냄새만 느껴졌다. 아기를 씻기며 오래전 옆집이 생각나서 빨리 벗겨지라고 손톱으로 살살 긁어주었다. 요 며칠 머리가 마른 뒤 벗겨진 소똥이 하나씩 보이기도 했다. 


      꾸릉내가 나던 아들이 30이 넘었다. 옆집 마누라 아들도 30 가까이 되었으리라.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새 내가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가 되었다. 40대 지인이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제법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고민을 들으면서 웃음이 실 실 나왔다. 이미 지나간 날들이 내게는 솜털처럼 가볍기만 하니…  당시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로 시작해서 짜증으로 끝내다시피 했. 내가 말을 앞세우지 않고 실천하는 모습만 보여주기로 방법을 달리 썼다.


      한자 寫經(사경) 책을 샀다. 화가 치밀고 아이들이 눈에 거슬릴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사경을 했다. 매일 써 댔다. 사경을 하면서 한 자 한 자를 꾹 꾹 누르며 욕을 해댔다. 하고 싶은 말은 한자(漢字)를 쓰면서 중얼거렸다. 한 달, 두 달 어느 정도 나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몇 년을 지속했다. 아이들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내 속이 문드러져도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밥솥에서 밥을 푸며 불평이 나왔던 내 입으로 "오늘 이 밥을 먹고 좋은 하루가 되어라."라고 의도적으축원을 했다.


      아이들에게서 내 마음을 걷어 들였다. 집착이라는 것을 거두었다. 내 어머니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천륜'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 나는 그 말을 들을 적마다 멀리 달아났다. 그런 내가 천륜이라는 집착에서 나를 잘라냈다. 손자의 머리 가깝게 대고 있는 분사기에서 물은 계속 흘러내려갔다. 손자가 두 팔을 벌려서 허우적댔지만, 비눗물은 서서히 씻겨졌다. 그렇게 집착이 녹아내렸다.

     

    딸이 퇴근하여 손과 얼굴을 씻으면, 손자가 어미에게 다가가려고 내게서 몸부림을 쳐댔다. 문득 '손자를 애써서 돌보았건만 어미에게 안겨서 할머니를 본 척 만 척하더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엄마의 젖을 먹고 크는 아기인데, 안아달라고 버티는 신호는 당연하다. 아기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답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 손자가 내 품 안에서 조용히 어미를 기다렸으면 싶었다. 할머니가 괴로운 줄도 모르고 발버둥을 쳐대니… 손자는 손자대로 원하는 것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를 떠밀어냈다. 나는 내 품에서 기다려 주기를 바랐고, 손자는 지금 당장 지 어미가 필요했다. 내망부석 같은 손자를 원하며 팔에 안고서 떠나보내려고 안간힘을 다. 지 어미가 서둘러 씻고 나와서 손자를 안았다. 불과 몇 분 안에 집착이 생기고 사라지는 무상(無常)을 경험하였다.



  갓난쟁이 조카가 귀여워서 별 별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누나 아파트로 배달시킨다. '머리에 소똥도 벗어지지 않은 놈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소똥이 벗겨진 아들은 어미의 마음을 편히 해주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위로해 줄 줄도 안다. 오히려 아들이 나를 가르치고 있다. 집착은 내가 만들었고, 또 부수어서 내다 버리기 수없이 하고 있다. 이젠 그 횟수가 완연히 줄었다.


         "아들아, 얼른 장가가서 머리에 꾸릉내 나는 아기 좀 낳아봐라. 어미의 부탁이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05234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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