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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뤼 Jul 03. 2018

따뜻한 허그가 필요한 회색인들에게

마스크를 벗고, 탁구공을 물어라!



마스크를 쓴 차가운 닫힌 세상, 그리고 지하철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들기 전 남자 앞에 선 세스코

영화, <오 루시!>의 시작은 지하철을 기다리는 세스코(테라지마 시노부 님)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영화 시작 1분도 지나지 않아 빠른 속도로 역으로 돌진하는 지하철에 투신한 남자와 사고가 발생하고, 사고로 인해 주변은 혼란에 휩싸인다. 화면 속 모습 속에서 투신하는 남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는 대화가 단절된 닫힌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인물, 세스코는 친구, 가족, 연인도 없이 회사와 집을 오가며 외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게 말을 건내는 직장 선배의 송별회에서 거침없이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며 흥겨운 분위기를 싸하게 하는 묘한 재능(?)도 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교육을 어린시절부터 받는 전형적인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캐릭터이다.

이런 세스코에게도 두려워 하는 것은 자살하는 것이다. 지하철 투신 사고 현장 속에서 세스코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덜덜 떤다. 그녀에게 바로 눈 앞에서 지하철에 투신한 사람을 지켜본 뒤로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일터로, 학교로, 가정으로 이동시켜주는 편리한 교통수단인 지하철은 영화에서 닫혀진 세상에서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의 자살도구로 사용된다.


회사 동료 정년 송별회에서 공격적 발언으로 갑분싸된 상황(왼쪽) / 기분이 상한 동료에게 미안하다 외치는 세스코(오른쪽)


이야기의 전개는 메이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친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 님)가 급전이 필요하다며 영어회화 수강권을 양도하면서 전환된다. 본인이 허용한 대화상대인 미카를 만날 때, 마스크를 내리는 장면에서 세스코의 캐릭터가 확실히 보여진다. 내가 원하는 사람, 내 기분에 맞는 행동 만을 추구하는 사회성이 낮은 외로운 중년의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미카는 영어회화 수강권은 60만엔(한화로 약 600만원)이며, 무료수강권을 통해서 사용해보고 양도받을지 결정해달라고 한다.

 조카 미카가 이모 세스코에게 영어회화 수강권을 양도요청하는 장면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감정

세스코는 고액 영어학원치곤 외관이 유흥주점같이 생긴 곳에서 잘생긴 외모의 강사 존(조쉬 하트넷 님)을 만난다. 존은 수업시간엔 영어로만 말해야 하며, 미국식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을 전해준다. 뽑기 통에서 이름을 골라 정해진 외국 이름, 루시! 이제 그녀는 금발 가발을 쓰면서 루시라는 외국이름을 사용하며 영어를 배우게 된다.

강사 존에게 세스코가 아닌 루시라는 영어이름을 받는 세스코미국식 인사라며 세스코를 허그하는 존

60만엔이라는 거금을 내기엔 터뮤니 없는 교육장소와 교육수준. 'HI, my name is lucy." 정도의 중학교에서 조차 다루지 않는 난이도로 강의를 하지만 세스코는 수강권을 양도받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존이 미국식 인사라며 허그를 해주는 행동이 굳게 닫혀있는 세스코의 마음의 벽을 허문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담배를 태우고, 주변의 따뜻한 말에 가시를 세우며 냉소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존의 허그는 젊은 날 풋풋했던 사랑이란 감정을 일깨워준 것이다.

미국식 인사라며 세스코를 허그하는 존


어질러진 집안에서 담배를 태우며 금발 가발을 쓴 세스코는 영어 인사말을 연습하며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찾아온 들뜬 감정에 60만엔의 수업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만날 잘생긴 존을 생각하며 삶의 활력을 찾는다.

퇴근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영어학원을 향했으나 사정이 생겨 존이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알고보니 세스코의 마음을 붕 띄어놓은 존은 조카 미카와 연인관계였고, 그들은 세스코가 양도받아 들어온 수강료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해 버린다. 좌절해있던 그녀에게 미카가 안부를 담은 엽서를 보내고, 존을 만나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미국으로 떠난다.

거리에서 사랑을 나누는 존과 미카

명목 상 조카 미카를 만나러 갔으나, 세스코의 속내는 존을 만나는 데 있다. 존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친자매지만 가슴 깊이 미워하는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 님)과 함께 한다. 이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언니가 꼬셔서 형부가 되었기 때문인지 언니의 말이며 행동은 모두 눈에 가시이다.

엽서에 적힌 주소로 세스코와 아야코는 찾아갔으나 존과 동거하고 있을 미카는 사라졌다. 존은 미카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다고 했고, 미카의 엄마 아야코은 존에게 미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라며 쌩떼를 쓰며 셋은 함께 이동한다. 힘들게 미카가 묵는 모텔로 찾아갔으나, 미카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모텔에서 묶게 되고, 그 와중에 그날 밤 저녁 모텔 앞 주차장에서 세스코는 존과 관계를 맺는다. 미카가 즐겨쓰던 샴푸를 사용해 그녀를 그리워하는 존을 성공적으로 꼬신다. 언니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과, 사랑하는 존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인 관계는 그녀를 우습게 생각하는 언니에 대한 방어기제, 젊은 날에 미쳐 못끝낸 숙제 같은 것이었다. 일방적 사랑을 즐기며 그녀는 욕망을 채워간다.

그러던 와중 찾게 된 미카. 미카는 존과 헤어지게 된 배경을 이모에게 설명하며 세스코를 무시하게 된다. 세스코는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본인도 존과 관계를 가졌다며 미카를 약올린다. 이에 미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벼랑에서 바다로 투신하게 된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말도 안되는 전개에 당혹스러웠다. 성숙하지 못한 어른과 분노조절장애로 죽음을 쉽게 선택하는 미카의 모습. 영화 도입부에 지하철로 뛰어드는 남자. 지하철에 홀로 서있으면 자살을 걱정하여 만류하는 역무원을 보며 현실이 힘들면 죽으면 해결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에도시대 때부터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실패를 하면 할복하는 문화가 생명의 무게를 경시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서는 일본 뿐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남은 생명을 포기해버리는 상처받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면, 미카는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존은 문제를 일으킨 세스코를 멀리한다. 얻은 것없이 잃기만 한 세스코는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다.

조카 미카에게 존과 관계를 가졌음을 알리는 세스코



사람에게 받은 아픔은 사람으로 잊는다

일상에 복귀한 세스코에게 회사 상사는 총무부로 부서이동을 권한다. 갑작스런 직무조정에 세스코는 불만을 드러내고 퇴사하게 된다. 사랑도 가족도 잃은 세스코는 살아 무엇하랴는 마음으로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하나, 세스코가 걱정되어 찾아온 영어학원에서 만난 타케시(야쿠쇼 쇼지 님)의 도움으로 살게 된다. 그녀는 영화에서 죽음의 상징인 지하철이 다가오는 플랫폼에서 타케시가 따뜻하게 허그를 해주자 구멍난 상처가 매워진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타케시의 허그로 위로받는 세스코

영화 루시는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치유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영화이다.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피해버리는 건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른이 되면서 나랑 안맞는 사람들. 심기를 건드리는 인연은 문제를 해결해보기 보다 피하거나 무시해버리게 됐다. 영화 속 타케시의 모습 속에서 상처받은 나를 발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일깨워주었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오 루시!>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가 100%라는 점을 내세워 마케팅을 했으나, 국내 흥행 성적은 썩 좋지 않다. 대중이 열광하는 화려한 영상미와 견주어볼 때, 유쾌하지 않은 주제이다 보니 비주류 팬들이 주로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서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무기력해진 자신을 진단할 수 있다. 반복되는 도시 생활 속에서 지쳐버렸다면, 당신에게 이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마스크를 벗고 탁구공을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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