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로 불리지만 충남 소재지의 시골 마을이다. 백화점도, 문화 시설도 찾기 힘든 곳이었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걱정 어려 묻는다. 낯선 그곳에서 갓난아기랑 씨름하느라 힘들지 않냐고.
글쎄,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해서 온 이사였기에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가족들의 걱정에 애써 괜찮은 척해본다. "뭘, 어차피 애 때문에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덕분에 책 읽을 시간 많아서 좋아" 등등. 이렇게 말하고 나면 마음은 편해진다.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반강제적인 집순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였기에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조금씩 공허해갔다.
3~4시간마다 깨는 아이 때문에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였고, 남편은 새로운 직장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다. 잦은 야근과 술자리는 거절할 수 없을 테고... 그러다 보니 독박 육아에 가까운 상황이 왔다.
남편의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다. 일에 적응하랴, 집에 오면 아이 보랴, 본인도 얼마나 힘들까? 항상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지만,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나 보다. 귀엽게만 느껴졌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짜증스러운 소음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몸에서는 이따금씩 들려온다. '경고!! 산후 우울증!'.
내가 말로만 듣던 그 '산후 우울증?' SNS에 몇 번 클릭했더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내 휴대폰은 도배가 되었다.
몇 년 전쯤, 일을 하며 겪어봤던 우울증이기에 다시 찾아온다면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얼마나 오래갈지, 아이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무슨 영향을 미칠지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해주는 SNS는 잠시 접어두고, 다이어리를 폈다. 출산 전, 아이를 낳으면 하루하루 육아일기를 써야지 하고 기대에 부풀어 샀지만 하얀 백지만 가득하다. 공허한 내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득, 출산 전에 읽었던 <결국엔 자기 발견>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1년 안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를 써보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썼던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생각났다. 분명 30가지 정도 쓰고 다 못 채웠던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써 볼까?
새하얀 다이어리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50가지 적었다.
지금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고 허무맹랑한 일이라도,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취미부터 사소하지만 작은 습관 만들기까지 다양하게 적었다.
독서모임하기,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가기, 책 한 권 써보기, 토지 1권 필사하기, 요리 연습하기, 거북목 교정 스트레칭하기 등등 30번까지 수월하게 적어갔고, 40번, 50번까지는 꾸역꾸역 고민하면서 채워갔다. 50가지를 다 채우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살펴보니 나의 관심 분야는 크게 6가지로 나뉜다. '가족', '육아' '글 쓰기, 독서', '자기 계발' , '건강', '취미'.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결국엔, 자기 발견>에서는 1년에 하고 싶은 리스트를 '100가지' 써보라 권유하지만 50번째부터 도저히 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나의 뇌가 새로운 일을 하기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일단은 50가지에 만족하기로 하고 다음 해, 다다음 해에는 꼭 100가지를 채우기로 다짐한다.
리스트 중 불가능해 보였던 일 '독서 모임하기'는 남편과 시간을 상의한 후 한 달에 한 번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한 줄 알았던 '종이 신문 구독하기'는 신문 배달이 안 되는 지역이라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E-BOOK 독서플랫폼을 구독 신청해서 경제 주간지를 읽는 것에 만족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브런치 작가되기'라는 도전을 실천하게 되었고, '남편 맛난 요리 해주기'를 통해 남편과의 사이가 더 돈독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는 점이 좋았다.
<2023년 버킷리스트 실천 완료 30개, 미완료 20개>
작년에 세운 50가지 버킷리스트를 체크해 보니 30가지는 실천하였고, 20개 실천하지 못했다. 20개는 올해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여 조금씩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문득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면 잊어버릴까 메모에 적어둔다. 사소한 바람이라도 잊히지 않게 버킷리스트에 옮겨 적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리스트를 하나 더 채웠을 때와 그 리스트를 성취했을 때 설렘을 알고 있기에 앞으로도 버킷리스트 채우기는 한해 한해 계속될 것이다.
물론, 나는 매일매일 성실하게 목표를 이행해 가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게으른 사람에 가깝다. 어떤 날은 육아에 지쳐 유튜브나 웹툰을 보면서 하루종일 시시덕거릴 때도 많고 어떤 날은 우울한 감정이 쌓여 감정 컨트롤이 안될 때도 많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나'와 그냥 하루하루 살아갔던 '나'는 달랐다. 전자의 '나'는 널브러져 있다가도 금세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추진력이 생긴 것이다. 이런 작은 변화가 나의 우울감을 떨쳐주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해 준다. 이 기특한 종이 한 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