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나만의 서재를 만들 기회였다. 혼수를 준비할 때 냉장고, TV 같은 큰 가전은 직원의 말과 계산기에 집중했지만 서재 가구는 나의 애정을 듬뿍 담아 골랐다. SNS에 아늑한 서재 사진을 캡처하고 여러 브랜드의 가구를 비교했다. 기다란 2인용 책상과 책을 가득 채워줄 책장 2개를 구매하고 즐거운 상상을 했다. 주말 아침에는 커피 내려놓고 책을 실컷 읽어야지.
막상 가구와 책을 갖춰 놓으니 서재에 갈 수 없는 이유들이 계속 늘어났다. 방이 춥고, 답답하다, 짐이 많다, 또 뭐가 있더라.. 핑계가 점점 늘어 출입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소파에 누워 남편과 티비를 보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넷플릭스만 있으면 주말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어느새 서재의 책상 대신 TV를 더 큰 걸 샀어야 했나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재는 가끔 거미가 나오는 음침한 창고 방이 돼있고, 몇 년 후 아이가 생겼다.
출산 후, 모든 방이 아이 물건으로 가득 찼고, 내 공간은 사라졌다. 그 좋아하던 TV는 거의 사망하기 직전이었고(큰 TV로 안 사길 다행이다) 24시간 껌딱지 마냥 붙어있는 아이가 있어 화장실을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주 무대는 자연스럽게 식탁이 되었다.
많은 소지품이 식탁의 한 공간을 차지했다. 노트, 펜, 태블릿, 독서대 등등 넓지 않은 식탁이 이 많은 것을 품고 있었고, 밥을 먹을 때마다 정리를 해야 했다.
점점 식탁이 지저분해진다. 밥풀이 다이어리에 묻어 있고 책에서 김 가루가 보인다.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기력까지 더해져서 다이어리의 체크리스트 개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책장을 넘기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출산하고도 놓지 않았던 책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나태했었나?', '아이는 핑계가 아닐까?'
미끄럼틀 타고 놀고 있는 아이 옆에 누워 생각했다.
'서재를 거실로 옮겨야겠다. 맨날 이렇게 누워있을 수는 없잖아?' 부피를 차지하는 큰 책장은 빼고 책상과 간단한 짐만 옮겼다. 평소였으면 남편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했겠지만 미루고 싶지 않았다. 책상 밑에 걸레를 깔고 쭉쭉 밀며 옮겼다.
공간만 바꿨을 뿐인데 나만의 작업실이자 카페가 됐다. 길쭉한 책상은 확장형 거실 큰 창문 앞에 놓았다. 고층 아파트에 남향이라 햇빛도 잘 들고 전망이 좋았다. 내려다보이는 사거리를 쭉 따라가면 큰 산이 보인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은 장관이다. 백화점, 대형마트 아쉬울 게 있을까. 전망 좋은 카페가 바로 집 안에 있는데.
남편도 이 공간이 마음에 드는지 야근을 집에서 하기 시작했다. 능률이 올라간다나 어쩐다나. 공간을 바꾼 지 1년이 지난 후 남편은 말한다. "작년 우리가 했던 제일 훌륭한 성과는 서재 책상을 거실로 옮긴 거야." 이백프로 동의한다. 육퇴 후 스마트폰만 보던 우리가 나란히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오늘 있었던 일 이야기, 아이 이야기도 하며. 노트북을 같이 보면서 주말 일정도 세운다. 확실히 대화가 많아졌다. 신혼 때 꿈꿨던 로망이 이제야 이뤄진 것이다.
나에게 이 2평 남짓한 공간은 큰 보상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책상에 앉으면 오늘도 고생했다고 이제 힘 빼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은은한 조명과 재즈 곡이 나오는 스피커로 제법 카페 분위기를 내주고, 밀린 업무를 한다. 남은 시간은 책을 읽고 감사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작은 서재 덕분에 평소 한 번도 꽉 채워본 적 없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빈틈없이 채웠고, 매달 읽은 책의 권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애정하는 만년필의 잉크는 한 달이면 다 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