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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보 Apr 16. 2024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인간 관계

관계에 심폐소생술을 하다

대학 새내기 시절, 내 별명은 '알바몬'이었다.

갑작스럽게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로망으로 가득 찼던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고깃집을 시작으로 레스토랑, 베스킨라빈스, 장어구이집, 과자 공장, 카페, 학원, 병원, 푸드코트 등 각 아르바이트에 대한 일화를 책으로 써도 될 정도로 많이 일했다. 학기 중에는 수업을 마치고 할 수 있는 저녁 알바를 했고 주말은 9시-9시 풀타임을 가동했다. (라떼는) 기본 시급이 3,800원 4,000원 하던 시절인지라 최대한 바삐 움직여야 했다.      

대학 친구들은 왜 이렇게 바쁘냐고, 알바를 줄일 수는 없냐고 서운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나에게 점점 일정을 묻는 말이 뜸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서서히 배제되어 갔다. 


한 때 유행했던 무지출 챌린지, 나는 10년 전쯤부터 실천 셈이다.

화장품 살 돈이 아까워 샘플만 모아놓은 스킨, 로션을 살 때도 있었고, 버스비를 아끼려고 아무리 먼 거리라도 1시간 일찍 출발해 걸어 다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아주 잠시였지만 국토대장정을 나가도 잘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은 이런 딸의 삶이 퍽퍽해 보였는지 미안해하셨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알바를 많이 하고 나니 돈도 차곡차곡 모아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점점 쉽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평소 낯선 사람을 만나면 긴장하고, 소심하게 행동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꽤나 능숙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진 나의 모습이 재밌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소설책만 보던 내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같은 자기 계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나도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흔히 쫄보였던 내가, 학원 강사나 홍보 내레이터 같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성향은 선천적으로 부끄럼이 많은 내향인이지만, 언제든지 '외향인 모드'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렇게 많은 교집합을 이루고 살았던 내 관계는 출산 후 나의 울타리를 높게 쌓았다. 나의 작은 아이에게 집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갈증이 났나 보다. 아이가 자는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생각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줌으로 하는 독서 모임이나 엄마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자기 계발 모임들이 많았다. 당시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있었던 터라 '그림책 독서모임'을 신청했다.

결혼 전 독서모임을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그림책 독서모임은 처음이었다. 무려 줌(Zoom)으로 하는 모임이라니! 궁금하기도 했고 도전이라 생각하니 기대됐다.

안녕달의 '우린 다시 만나', 이노우에 마사지의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웬디 케셀만, 바바라쿠니의 ’ 엠마' 등 한 주의 한 권씩 그림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눴다.    

그림책 모임은 매주 두꺼운 책을 읽어야 되는 독서 모임과 다르게 부담이 없다. 육아에 지쳐 깜빡 그림책을 못 읽었어도 상관없다. 모임 시작 전 몇 분 만에 후딱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았던 점은 그림책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새내기 엄마들의 고충을 나누며 눈물짓기도 하고, 사소한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면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갈증이 조금씩 채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목이 말랐다. 새로운 인간관계는 즐겁지만 오래된 인간관계가 주는 편안함과 비교할 수 없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속을 터놓고 싶은 깊은 인간관계에 목말랐지만 단톡방에서 나의 지분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무리 친해도 결혼을 안 했거나 아이가 없는 친구들과는 관심사가 다르니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가 않았다. 육아 얘기도 자주 하면 재미없는 아줌마가 될 뿐. 친구들에게 나는 육아밖에 몰라!라는 이미지를 심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운동을 하고 싶은데 의지가 없다는 친구들의 말에 넌지시 던져보았다. '우리 운동 인증하기 할까?' 고등학교 친구들로 이루어진 찐친 단톡방이었다. 생각보다 좋은 반응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에 살아서 이전처럼 같이 운동할 순 없기에 sns에 인증하듯 단톡방에 매주 자신들의 운동 사진을 올리기로 했다. 운동을 못하면 벌금 걷기로 하고 일단 시작했다. 친구들은 발레, 요가,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나 또한 자극을 받아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을 끊었다. 헬스장을 이렇게 꾸준히 다녀본 적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이 모임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모두가 열심히 하는 바람에 벌금이 크게 모이지 않았는 점이다.  

    

꽤나 성공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모임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분야를 넓혀 경제 신문도 읽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서른 중반이 되니 주식이나 부동산쯤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 상식이 되었다. 관심은 많은데 공부하기 어려운 건 나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욕이 앞서 다 같이 경제 신문을 매일 읽어보자! 했지만 과유불급이었다. 하나, 둘 힘들다며 이탈하기 시작해 계획을 수정했다. 주 1~2회 자유롭게 읽어보기로. 참여 멤버도 넓혀 남편들까지 끌고 와 톡방을 만들었다. 8명의 직업이 다르고 관심 주제가 다양해서 올리는 기사의 내용들이 다채로웠다. 1년 정도 지속하다 보니 대화의 소재도 넘쳐나고 친구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어서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깊은 관계에도 작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마음이 맞는 직장 동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독서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이는 문유석의 '쾌락독서'에서 영감을 얻었다.

워킹맘 판사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독서 모임을 한다는 글을 읽고 '이거다!'싶었다. 점심시간을 활용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직 인원이 구성되지 않았지만 시작하게 된다면 친구들과의 단톡방처럼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지리라 기대한다.      

아이가 생기면 기존의 인간관계에서 멀어지고 포기할 부분이 많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막상 잃은 건 수북한 머리카락뿐이다. 가장 슬픈 일이지만.

내가 놓지만 않으면 이 관계는 다른 방법과 형태로 심폐소생술이 가능하다니 내게 필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그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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