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메리 V. 디어본
베니스는 청소년기에 <베니스의 상인>을 읽으면서 이름만 익숙해진 도시였다. 악독한 고리대금업자에게 지혜로 맞서 인생의 역경을 헤쳐 나간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돈을 못 갚으면 칼로 살을 1파운드 베어내겠다는 잔인한 계약의 잔상이 깊게 남아서 도무지 그 도시를 아름답게 그릴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상상한 베니스는 좀 무섭고 우중충한 곳이었다.
하지만 베니스를 방문한 이후,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고 각인된 이미지는 까맣게 잊고 품격 있는 예술의 도시로 기억하게 되었다. 베니스에는 페기구겐하임미술관도 있다. 요즘의 미술관 건물과 비교해 보면 층고도 현저히 낮고 규모도 크지 않다. 그런데 미술관으로 치면 약점일 수 있는 이런 구조가 오히려 편안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술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씨와 어디서든 바닷물이 찰랑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이 도시가 무턱대고 좋아진다. 베니스에 푹 빠져 미술관을 설립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페기 구겐하임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페기 구겐하임: 예술중독자>는 미국의 부호가문인 구겐하임가의 상속녀이자 미술품수집가였던 페기 구겐하임의 인생을 자세히 알려준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집안의 딸이었지만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타이타닉호의 사고로 사망했고 사이가 좋았던 친언니는 출산 중 사망한다. 페기의 결혼생활도 순조롭지 않았다.
책에서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드는 성지였던 1920~30년대의 파리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성장한 뉴욕 미술계를 배경으로 페기 구겐하임의 인생이 신나게 펼쳐진다.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 페기는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아내였다. 남편의 가정폭력과 이상한 성격에 지쳐 이혼한 후, 그녀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현대미술에 매진한다. 이때부터 그녀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페기가 런던에 연 ‘구겐하임 죈’은 당시 최신 트렌드였던 유럽의 초현실주의를 런던에 소개한 상업 화랑이었다. 하지만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을 열겠다는 결심을 하고 화랑을 접는다. 페기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파리로 가서 작품을 사 모으지만, 전쟁으로 인해 런던에 미술관을 건립하려던 계획은 실행할 수가 없었다. 유럽을 탈출해 뉴욕으로 간 페기는 ‘금세기미술화랑’을 연다. 페기의 참신한 의도가 담긴 이곳은 뉴욕의 인기 명소가 된다.
솔로몬 구겐하임과 힐라 레바이 남작 부인이 의도한 고급 예술의 전당-바흐의 파이프 오르간으로 완성되는-에 반하여, 페기의 상호 작용적 갤러리는 예술 관람의 재미를 제공해 주어 돈 많은 구매자뿐 아니라 일반 관중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페기의 갤러리는 매우 대중적인 사업이었다. 보도 자료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녀가 머릿속에 그린 것은 단순한 갤러리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환되는 곳이었고, 정체되고 동떨어진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예술의 공간으로서, 알려지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예술가들을 소개하여 궁극적으로는 금세기 예술에 공헌하게 되는 그런 장소였다. 그 사명은 진실로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는 완전히 생소한 목표였다.”
이후 베니스로 옮긴 그녀는 현재 페기구겐하임미술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술품을 전시해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고 사망 후에는 미술관 정원에 묻혔다.
페기 구겐하임은 칭송을 받기보다는 비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술 자체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고 쑥덕였다. 특히 섹스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예술가들과 잠자리를 가진 페기의 이력과 못생겼다는 평을 받는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이 악랄하게 이용하기 좋은 소재였다. 이 글의 저자는 페기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힘과 영향력이 있는 여자가 가진 에로틱한 에너지에 특히 위협을 느낀다.”
페기와 친구가 된 예술가 오노 요코는 “많은 남성 화가들이 자기들의 성공한 인생에서 그녀의 역할을 인정하기를 꺼린다”라고 말하면서, 페기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지만, 여자가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쓸데없이 비판을 많이 한다. 그럴 땐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법이다” 라며 페기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세태에 일침을 가했다.
책을 읽다 보면 업계의 실력자들을 데려와 적재적소에 쓰는 페기의 경영능력과, 폭력적인 전남편과 그의 재혼한 가족까지 살피고 주변 사람을 돌보는 그녀의 넓은 아량에 놀라게 된다.
페기는 세상의 이목을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에 구애를 받지도 않고, 능력에 제한을 두지도 않았다.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경험했다. 베니스에 가면 이 멋진 여성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