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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Apr 09. 2024

삼식이와 계란말이밥

제1회 오뚜기푸드에세이 응모글(과거형)


우리 집에는 삼식(하루 세끼 먹는, 三食)이가 산다. 엄마인 내가 둘째를 ‘삼식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쁜 아침에도 빵 아닌 밥을 먹고 점심 먹으며 저녁 메뉴와 식후 디저트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탓이다. 그렇다고 밥양이 많거나 식탐을 타고나지는 않았다. 단지 먹는 것에 진심인 편이라 그때 그때 먹고 싶은 음식을 맛있게 먹자는 주의 같아 보인다.

그 아이가 2020년 코로나가 창궐한 시기에 수능 입시를 치렀다. 코로나로 인해 등교 일수가 줄어들고 저녁 급식도 끊긴지라 저녁식사는 어지간하면 ‘엄마표 도시락’으로 준비하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언제 이런 다짐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어느 날부터 학원이나 독서실 근처 차 안이나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불고기덮밥, 차슈덮밥, 김치볶음밥, 매운 갈비덮밥, 김밥 등 덮밥 행진이 이어지다가 간간이 육전을 부쳐다 주거나 좋아하는 소고기뭇국, 닭죽, 양파수프를 끓여 죽통에 따끈하게 담아다 주면 그날은 더욱 좋아라 하며 도시락을 금세 비웠다.


그렇게 도시락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갔다. 요즘 젊은 엄마들처럼 검은깨와 치즈로 장식한 모양새 뛰어난 예쁜 도시락도 아니고 유명 음식점의 맛보장 메뉴도 아니었다. 다만 하루종일 마스크 끼고 공부하느라 낑낑 대는 녀석을 생각하면 저녁이라도 엄마 손으로 챙겨 먹이자는 마음뿐이었다. 때론 이런저런 볼 일로 도시락을 구입해서 가져다 줄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삼식이가 좋아하던 엄마표 메뉴는 바로 ‘계란말이밥’. 이 신박한 메뉴는 인별그램에서 요리 동영상 장인으로 유명한 ‘마카롱여사님’ 계정에서 찾은 것이다. 어느 날 발견하고 스스로 전수받은 것이다. 게다가 명절 선물로 들어온 묵혀둔 햄세트를 소비하기에 딱이다 싶어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법도 간단하다. 햄을 칼로 다지지 말고, 매셔로 으깨고 여기에 입맛에 따라 다진 청양고추를 적당히 넣고 볶음밥을 만든다. 한 김 식으면 한 입 크기로 주먹밥을 조물조물 뭉쳐둔다. 달군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한 숟가락씩 길게 떠서 그 위에 주먹밥을 올린 뒤 돌돌 말아서 한 접시 푸짐하게 내어주면 끝! 볶음밥 만들기-주먹밥 뭉치기-계란물 씌우기의 3단계를 거치니 시간은 좀 걸린다.


먹다 보면 느끼해지는 햄을 청양고추의 맵싸한 맛이 덮어준다. 햄과 청양고추의 강렬함을 심심한 계란이 살포시 덮어주는 케미가 있다. 밥에 온기가 남아있을 때 먹으면 더욱 맛있어서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냉장고가 텅 비고 반찬 없는 날, 후다닥 내놓기 좋아 주부로선 아주 만만한 한 끼인 셈이다. 레시피를 써두고 커닝할 만큼 복잡한 조리법이 없으니 생각나면 바로 해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계란말이밥이다. 아무런 도시락 아이디어가 없는 날 해주기에 딱 좋다. 게으른 엄마도 레시피 없이 뚝딱 요리할 수 있다는 얘기다. 햄이나 계란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재료에 속하니 간단하고도 실천하기 좋은 레시피를 공유해 주신 마카롱여사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주방에서 햄은 주로 이럴 때 쓴다. 볶음밥에 고기 대신 넣거나, 길쭉한 햄을 사서 김밥 말 때 쓰거나, 부대찌개에는 햄을 아낌없이 사용해 주요 식재료의 주인공이 된다. 여느 집처럼 우리 집도 가공된 돼지고기인 햄보다는 생고기를 선호하는 편. 하지만 똑같은 햄도 으깨서 조리하면 그 맛이 조금 달라지기는 한다. 이는 백종원 백주부 레시피에서 배운 거다. 부대찌개에 햄을 으깨서 넣으면 햄이 아니라 진짜(?) 고기 맛이 난다길래 따라 해보니 정말 그랬다. 이전에는 햄을 내돈내산 한 일이 없었으나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요즘에는 내 돈 주고도 사 먹는 게 스팸햄이다.


오늘 저녁으로 계란말이밥 해줄까? 우리 집 삼식이가 한 번도 “no” 한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야말로 비장의 히든 메뉴에 속한다. 잘 먹는 걸로 힘든 수험생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던 지난해. 계란말이밥이 도시락에 담기는 날엔 삼식이가 그리 맛있게 먹으며 엄지 척을 해줬으니 엄마인 나로서는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둘째가 수능을 보던 해에는 수능이 미뤄져 12월 3일이었다. 수능을 앞둔 엄마들 모임에 나오는 단골 주제는 ‘수능 당일 도시락에 무얼 싸줘야 하나?’이다. 평소 안 먹던 반찬은 싸주지 말아라, 샐러드 등 날 것인 재료는 피해라, 소화 잘되는 나물 반찬을 싸줘야 한다, 춥고 긴장해서 체하기 십상이니 죽을 싸야 한다. 급기야 보온 도시락은 어느 브랜드가 좋다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이어진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둘째 삼식이와 수능 도시락 메뉴를 일사천리로 정했다. 물론 마카롱 여사의 계란말이밥으로 말이다. 수능 당일 컨디션은 아무도 모르니 예비 메뉴로 야채죽을 함께 준비하는 것으로 보완 전략까지 마련했다. 역시 삼식이는 수능 당일에도 계란말이밥은 한 덩이도 남기지 않았다.


그랬던 삼식이가 입시가 끝나고 엄마 품을 떠났다. 옷가지와 책 등을 바리바리 싸서 학교 기숙사로 입소했다. 삼시 세 끼는 잘 챙겨 먹고 있는지 엄마와의 통화에서 1절은 늘 ‘아침은 점심은 저녁은 뭘 먹었니?’다. 최근에는 누나의 제안으로 오뚜기 컵밥 세트를 삼식이에게 배송시켜 줬다. 기숙사 식당이 문을 여는 그날까지는 다양한 풍미의 컵밥 월드를 우리 집 삼식이가 종종 경험할 것이다. 4월 중순 가족 행사가 있어 둘째 삼식이가 집으로 다니러 온단다. 벌써 그날이 기다려진다. 다른 호사스러운 음식은 몽땅 제쳐두고 오랜만에 계란말이밥을 정성스럽게 해 줘야겠다. ==============

*이 글은 2021년 제1회 오뚜기푸드에세이대회에 응모했던(결과는 탈락!!) 글입니다. 에세이 주인공인 삼식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다시 집을 떠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중입니다. <삼식이와 계란말이밥 >은 데스크톱에 저장해 두고 한 번씩 열어보는데 벌써 몇 년 전 일이네요. 수상을 떠나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두길 참 잘했다 싶습니다. 브런치에 살짝 공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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