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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대로 짓는 글

feat. 오후의 글쓰기 - 이은경 지음.

by 글짓는 날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 글을 짓는 깜냥으로는 주제, 의도, 대상, 순서, 방식, 컨셉을 정하고 설계하고 글을 짓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좋은 레시피대로 글을 짓기로 한다. 굵은 글씨에 밑줄 친 부분은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의 글쓰기'에서 제시한 문장과 과제이다. 부족한 실력이기에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쓰이고 활용될 수도 있다.(이점 넓은 아량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처음이라 잘 짓긴 어렵겠지만 꾸준한 글짓기를 위한 마중글이 된다면 행복할 것 같다. 문장과 과제의 활용에 따라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소설이 될 수도 있는 이상한 형태의 글이 되겠지만 일단 써보라는 작가님의 조언에 따라 일단 쓰도록 한다.

아, 시작하기 전에

푸른색 문장은 작가님이 주신 문장입니다.

밑줄친 문장은 작가님이 주신 과제입니다.


자, 레시피 대로 짓는 글, 오늘의 첫 문장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은 김람우와 정희완이다.

고등학생인 이 둘은 만우절 장난으로 서로의 이름을 교환한다. 교환한 이름으로 지내던 어느 날 희완은 람우를 위해 람우의 이름 '희완'으로 이벤트에 응모한다. 거기서 람우는 사고로 죽게 된다. 세월이 지나 어느 날 희완의 앞에 람우가 나타난다. 희완의 생을 거두기 위한 저승사자로.

드라마 제목은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일 때 여의도엔 인라인 스케이트가 열풍이었고 수많은 동호회가 싸이월드에 창궐할 때였다.

"당신이 돼보고 싶은 것, 혹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동호회에 올라온 게시글이었다.

[저승사자. 사랑하는 이의 생을 거두워 보고 싶다.] 나의 댓글이다.

드라마를 보던 중 문득 당시의 동호회 게시글과 나의 댓글이 떠올랐다.

추억이 없던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고 아버지의 투병기간 동안 사귀던 여자는 헤어진 뒤였으나 아프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된 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내가, 사랑하는 이의 생을 거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고 이런 상상을 해본 것 같다.


'오늘은 좀 고단하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그녀였어. 내 임종을 지켜봤던.'

'행정 착오였던 것 같은데. 힘들었겠네.'

'뭐, 그냥 일이었어. 당황한 건 그녀 쪽이고. 단지 당황한 그녀의 눈빛이 안도인지, 불안인지, 의심인지 모르겠더라고. 분노 같기도 하고. 그 생각을 잠깐 했어'

'죽음이잖아. 어느 쪽이든 당연한 반응 같은데.'

'딱히 어느 쪽이든 관계는 없는데... 그냥 생각이 많았을 뿐이야.'


다행이라 생각한 건 사랑하는 이보다 내가 먼저 죽었을 것이라는 전재와 그이의 사랑이 거짓이었다 해도 그 정도면 보상이 될 것 같다는 안도감이었다. 이렇게 못돼 먹은 나는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세 번째 정주행 중이다.


[카톡~!]


드디어 입금을 확인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돈이 내 통장에 있다. 무려 '백오십만' 원, 이제 이 돈으로 무얼 해볼까?라는 고민을 하기엔 안타까운 액수와 출처이다.

투자자를 만나는데 접대할 돈이 부족하다며 돈을 빌려간 선배는 접대비가 부족했는지 두 달이 지나서도 투자를 받지 못했고, 그깟 푼돈 금방 갚겠다던 그 선배로부터 일 년 만에 들어온 안타까운 '백오십만' 원이다.

이 안타까운 '백오십만' 원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지인 춘승과의 일이 떠올랐다.


"억울해 죽겠는데 술이나 한잔 합시다."

"나만큼 억울할까? 월급도 못 받고 꿔준 돈도 못 받고 있는데."

"아직도 못 받았어요? 모르겠고 빨리 나와요. 안 그러면 뉴스에서 보게 될 거야."


당첨확률을 두배로 높이겠다는 신념으로 평소와 다르게 2만 원을 투자한 춘승의 로또 당첨확률은 그의 바람대로 높아졌고 당첨금은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백오십만' 원이었다. 당해 본 사람만 안다는 세상 억울한 3등에 당첨된 것이다. 번호 하나 차이로 '백오십만' 원은 세상 억울한 당첨금이 되었다.


"인생 뭐 있어요. 소나 먹읍시다. 내일 돈 찾으면 어차피 제로썸이야."

춘승은 억울한 당첨금 '백오십만' 원을 수령하기도 전에 원풀이로 '백오십만' 원을 쓸 기새였다.

"차라리 없던 일로 칠라고...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소는 그냥 내가 사는 거고 팀장님 돈 급하다며? 얼마 되진 않지만 급한 대로 써요. 천천히 갚아. 안 갚아도 되고"


김선배의 투자유치를 위한 접대비로 '백오십만' 원은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빌려줬으면 투자유치에 성공했을 텐데. 그러면 완전 로또인데'라는 생각을 하며 날 원망 했을지도 모른다. 춘승의 억울한 당첨금 '백오십만' 원까지 빌려줬다면 투자유치에 성공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나마 안타까운 '백오십만' 원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칫 잘못했으면 사람까지 제로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아래 기사를 보고 난 후이다.


[경기도 외곽에 사는 차모씨(43세)는 오늘 매우 황당한 일을 마주했다. 그 일은 저녁마다 들르던 제육식당에서 발생했는데 경위는 이러하다. 당일 저녁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지인 박 씨의 연락을 받고 약속장소로 나간 차씨는 우연히 채무자인 선배 김 씨를 만났다. 차 씨는 김 씨에게 상환을 요구하며 실랑이를 벌였고 이 둘의 관계를 알던 지인 박 씨는 돈 '백오십만' 원이 적은 돈이냐며 독촉에 가세하게 되었다. 채무자 김 씨는 모친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연락하지 못했다. 지금은 투자를 포기하고 취직해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 이달 급여일에 꼭 갚겠다, 안되면 상치르고 남은 조의금으로라도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정을 들은 박 씨는 차 씨에게 다행히 갑자기 생긴 여유돈 '백오십만' 원이 있으니 급한 대로 융통하고 선배 김 씨에게는 급여일 상환을 약속받고 실랑이는 일단락되었다.]


"쓰지 마라, 재미없다."

친구 윤후가 딱한 눈으로 한마디 던진다.

"두 가지 사실로 하나의 기사를 만들었는데.. 나름 지어본다고 한 건데."

"쓰지 마. 아니야"

"뭐가 그렇게 아닌데"

"저건 일상이지, 사건이 없잖아."

"왜 사건이 없어. 찬실 씨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네. 김선배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아. 막내아들 투자받고 성공하는 것도 못 보고 김선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야이씨.. 그건 아니지. 이 새끼 이거 위험한 새끼네, 어디까지가 사실이야?"

"7대 3 정도, 뭐가 7인지는 영업비밀이고. 가만있어보자 사건이라 할만한 게..."

"하나 있지 않나, 대입 떨어지고 이듬해 봄."


아! 지금도 제법 생생하게 기억나는 소소한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20살 때의 일이다.


연수연.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는 20살의 나이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으며 뚜렷한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 비해 반가운 표정으로 나의 계절에 들어왔다.

봄이었고 20살이었다.

완전하게 성장하지 못한 정신과 노병사만 남은 절정의 육신은 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유희로 그 계절을 보냈다.


머리끈으로 곱게 묶은,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소포로 받고 다섯 번인가 토했을 때 친구가 찾아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친구는 짧은 이야기를 전했고, 그 친구가 돌아갔을 때 다른 친구가 와서 무릎을 꿇었다. 조금 후 다른 친구 둘이 무릎 꿇은 친구를 일으켜 사라졌다. 그 셋이 사라진 곳에 다른 친구가 술병을 들고 서있었다.

계절이 끝났다.


끝이날 계절이었다. 나의 계절은 변하고 있었고 그녀의 계절은 봄이 계속되길 원했다. 나의 계절은 여전히 변하고 있고 그녀의 계절은... 여전히 봄이었으면 좋겠다. 무릎을 꿇었던 친구는 나의 계절에도 그녀의 봄에도 없다.

친구라며, 개새끼.


나에게 짧은 이야기를 전한 친구는 버스 운전석에서 변하는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 오른쪽의 친구는 토목공사 현장에서 전국의 계절을 버티고 있고 왼쪽의 친구는 3년에 한 번 정도 만나지만 나의 계절에 있다. 술병을 들고 서있던 친구는 제발 글 쓰지 말라고 구박 중이다. 각자의 계절을 공유하고, 각자의 계절에서 살아가고 있는 좋은 친구들이다.


나름 적지 않은 계절을 반복하는 동안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다. 간혹 별난 사람이 있었고 아주 적은 경우로 조금 견디기 힘든 사람이 있었다. 각자의 결이 다르다는 생각에 상처 입거나 상처 준 기억은 없다. 견디기 힘들면 조금 멀리 두고, 별나다 싶으면 조금 더 지켜보는 정도다. 딱 이 정도만 유지해도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거나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신 있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나마 인간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 설명보다는 '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인간관계를 이렇게 해석하고 사는 사람도 있다'라는 표본의 예시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말이 있다. 뒤에 따라올 말은 아마도 '그러니 타자의 욕망을 자신에 투영하여 행복을 구현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어 행복을 구현해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는 저 말을 '내가 좋으면 내가 좋은 게 아니고 네가 좋아야 내가 좋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행동했다.


95년도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받고 얼마 되지 않은 아침, 입대 동기는 '좀 답답하지 않아? 환기 좀 시켜도 되겠지' 라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기에게 날아온 선임의 배게. 그리고 집합. 선임은 조용히 말했다.

"제발 부탁이다. 내가 니들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니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하지 않는 것. 이건 해도 되겠지 하는 거, 옳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잘한 일이든, 무조건 하지 마. 그것만 지켜 그럼 막내생활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다. 다시 한번 부탁한다. 제발 무엇이든 일단 하지 마라."

'인간은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어선 안된다. 인간은 실세의 욕망을 욕망하면 된다.'

저 날 아침 얻은 교훈이다.

광고 일을 하면서 조금 다른 결일 수 있지만 비슷한 맥락의 사실을 깨닫기도 했는데 광고의 제작 의도, 광고를 보는 대상, 제작물의 컨셉 등 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바로 광고주의 취향이다.

"뭐, 컨셉도 좋고, 비주얼, 카피 다 좋네요. 고생하셨네요. 음...근데 뭐랄까"

"아! 뭔가 수정해야 할(취향 하고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수정해서 될 건 아닌 것 같고요. 저게 맞는데. 글쎄요. 다른 시안 하나 더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당연하죠.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친구 윤후와 야구를 볼 때였다.

"뭐라는 거야. 저것도 광고라고 클리닝 타임에 나온다. 저렇게 만들면 안 쪽팔리나"

"아마 원래 저런 그림은 아니었을 거야. 광고주의 요구사항에 따라 편집과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일정과 예산에 쫓기게 되거든 그러다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점이 생겨. "아. 이제 좀 볼만하네요."라고 말하면 "좋은 의견 주신 덕분이죠"라는 대답으로 끝나. 어떤 말을 하려고 만들었는지는 의뢰한 사람과 만든 사람만 알아. 보는 사람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 너처럼."

"넌 아냐?"

"정신없고 그림 좋네, 아마 양쪽 다 맘에 들어할걸. 우리보다 연봉도 쌔고 더 많이 배우신 분들이야. 부끄럼도 덜 타실 거고"


나는 여전히 라캉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살고 있다. 그게 편하고 정신건강에도 좋으며, 많은 경우 그 타자들도 좀 많이 좋아했고 관계유지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야 내 탓 안 하고 남 탓하며 편하게 살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의 잘못된 해석 덕분에 별 재주 없이도 먹고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광고 기획이든, 사이트 기획이든, 마케팅 기획이든 다 사람 마음에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없는 재주지만 기획하면 만들어줄 사람들과 팔면 사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 평타는 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명함만 있는 백수로 산다는 건 불안한 매일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어제 오후에 들은 한마디가 계속 맴돈다.


오랜만에 상윤형님과 형선형을 만났다.

"요즘 뭐 하니? 개발회사랑 협업해서 뭐 만든다며"

"QA 중인데 다행히 두 군데 수주도 했습니다."

"그래? 잘했네. 야. 근데 그거 하면 다음엔?"

최근에 광고회사에서 정년퇴직하고 다른 결의 광고일을 하고 있는 상윤형님이다.

"뭘 더 해야 해요?"

나의 물음에 형선형이 나선다.

"이해해라, 상윤형이 요즘 생각이 많으시다. 형, 승재는 지가 알아서 해. 형 걱정이나 좀 하라고, 열심히 좀 하지 마! 그냥 가끔 카피 워싱이나 하고 광고주랑 골프나 처, 형이 열심히 하면 다 부담스러워한다고. 성대표도 곤란해하고. 젖은 낙엽처럼 조용히 살자."

"난 그게 그렇게 안되더라. 뭘 안 하면 불안해"


'불안'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고 이전까지 없던 불안이 생겼다.

정시 출근할 때보다 부지런해진 요즘의 매일은 불안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새로운 일에 대한 설렘은 좋게 포장된 '불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불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어제의 불안은 오늘 잠깐의 고민이 되었고 내일은 기우로 변해 있을 것이다. 내 잘못으로 인한 불안만 아니라면 크게 불안해할 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결과는 생긴다. 결과에 따라 그에 맞는 것을 하면 된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한다. 가만히 있어야 하면 가만히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아마도 상윤형님이 가장 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 사라질 불안을 오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매일이 불안이었다면 그만 불안하기로 하자. 개발 중인 서비스는 QA 중이고 적지만 수주도 해놓은 상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놨다. 지금은 가만히 있자.


아니, 야구나 보자!!

아! 야구를 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내 기준에서 가능하면 보지 말아야 할게 세 가지 있다. '야구'와 '뉴스'와 '가족'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는 무조건 보게 된다. 그나마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건 다행이고 같이 봐선 안된다는 건 규칙이다. 그나마 가족과는 못 봐도 친구랑 보는 건 가능한 게 야구다. 친구랑은 뉴스도 같이 봐선 안된다.


그러고 보니 애들이 바쁜가, 최근 들어 카톡방이 조용하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이 정시 퇴근이라는 걸 할 때는 '월례'라는 모임이 있었다. 월에 한번 모이는 행사가 아닌, 매주 월요일에 큰일 없으면 보자는 모임이 '월례'였다. 나와 윤후를 제외하고 가정을 일찍 꾸린 친구들은 행복하고 치열한 주말보다는 야구도 쉬는 월요일을 진짜 휴일처럼 여겼다. 주말 동안 쌓인 피로는 출근해서 마시는 달달믹스커피로 1차 극복하고, 주말 3연전 야구 이야기와 간이 쌘 제육볶음으로 전우 같은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한 후 '조금만 버티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꼬치집 카피처럼 설레는 퇴근을 기다렸다.


'왔어?'

'왔는가?'

'주말에 더 늙었다.'

'애는?'

'괜찮아'

'장가 안 가냐?'

'가겠냐?'

'불 좀 줘봐'

'뭐 시켰는데'

'제육'

'에헤이. 점심에 먹었는데'

'뭐, 딴 거 하나 더 시켜'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짠만하고 같이 가.'

'크으. 아. 제육 먹었는데, 꽁치 하나 시킨다. '

'아오~씨. 이게 또 마시니까 들어간다.'

'어제 봤냐?'

'보다가 어레스트 올뻔했다. 아 병신들 진짜..'

'담배 피운다며, 야구 생각했더니 담배 마렵다. 니들은 안 가?'

'갔다 와. 들어오기 전에 폈어. 야, 니 회사 옮긴다며?'

'지민이 학교 들어가잖아, 형님이 생각이 많다.'

'장가 안 가냐?'

'가겠냐'

'너랑 윤후가 장가를 가봐야 형님들 맘을 알 텐데'


각자의 계절에 살고, 각자의 계절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주 있던 '월례'는 매달 있는 '월례'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자주 만나기 힘들어진 우리는,


'이번 주 금요일에 올라가는데 함 봐야지'

'어디서?'

'저번에 거기 어때'

'어디?'

'아, 너 안 왔지?'

'야이씨, 안 간 게 아니고 못 간 거지. 어딘데?'

'그 집 제육 괜찮아'

'어디냐고.'

'어. 맞아 그 집 제육 좋아'

'오케이. 금요일 거기서 봐'


그냥 틈만 나면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연락이 없다. 윤후한테 전화나 해보자.


"애들 연락 있냐?"

"휴가철이 자나, 지 식구들하고 휴가 갔겠지"'

"아하! 니는 뭐 하는데?"

"휴가"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고 충실하게 각자의 뜨거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행복하고 충실한 계절이 지나면 제육과 꽁치김치찌개에 야구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니는 뭐 하는데? 또 뭐 쓰냐?"

"쓰긴 하는데 맞나 모르겠다.'

"제육에 한잔?"

"잠깐만, 쓰던 거만 끝내고."

"끝나긴 하냐?"

"끝이 나겠냐. 시키는 대로 쓰는 글도 어렵다"


출근하듯 밥 짓듯 쓰고 싶지 않을 때도 쓰라고 했던가.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면, 글짓기를 시작한다. 의미를 두고 글을 짓기에는 너무도 어쭙잖은 솜씨고 의미 없이 글을 짓자니 내가 짓는 글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럼에도 출근하듯, 밥 짓듯 당연하게 쓰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다.

밥 맛있게 짓는 게 쉬운 거 아니겠지만 먹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고, 물조절도 못한 것 같은데 의외로 '먹을 만 한데'라는 요행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쭙잖은 솜씨 이기는 하지만 글 짓는 게 나름 재밌고 좀 많이 설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건너뛰면 다시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고, 일단 뭐라도 쓰면 어떻게든 써지기도 하는 것도 같아서 하루에 한 꼭지라도 쓰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글쓰기 너무 싫은 날이다. 글은 왜 쓰겠다고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원래는 '월례'가 있어야 할 월요일이며, 원래는 출근을 하는 월요일이다. 사실 글쓰기 좋은 요일 일 수도 있다. 뭔가 시작한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있고, '그래! 다시 한번 파이팅!' 일수도 있는 월요일이다.

하지만 어제도 쓰고, 그제도 썼다. 맨날 맨날 쓰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시간을 빼고, 야구 보는 시간 빼고... 어? 나 좀 열심히 쓴 것 같은데.


조금 지쳤을 수도 있을 것 같고(고작 요걸 쓰고?) 쪼끔 쓰기 싫을 수도(이마저도 싫으면 뭐 하게?) 있겠는걸. 어쩌면 30년 직장생활에 적응한 생체시계의 항상성과 이를 거부하고 계속 써야 한다는 향상성의 대립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쉬어주는 게 맞다.

회사생활도 그랬다. 출근하기 싫은 날, 급 연차를 내고 쉬다가 광고주의 호출로 튀어나간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쉬어주는 게 맞다.

회사생활이 아니지 않나. 쓰기 싫은 날은 과감하게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차분하게 쓴 글을 읽어보자. 차분하게 읽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과연 내일도 쓰기 싫을지. 그리고 지금 쓰기 싫다고 안쓸 상황인지. 아무튼 그래도 이만큼 썼다. 제육정도는 괜찮겠지. 내일도 쓸 거니까.


차분하게 읽은 결과 느낀 점은, 참담함.

그래도 그만큼 썼다고 제육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어제의 나를 반성하게 만든 참담함. 독하게 마음먹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기엔 너무도 아마추어다. 하지만 오늘도 열심히 쓰기로 한다. 오전에 먹고사는 일은 끝낸 상황이다. 야구가 시작하는 6시 30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다. 열심히 써보자!

'어..아니 잠깐만. 먹고사는 일 말고 할 일이 더 있지 않았나?'

그래, 오늘 하려던 일이 있었다. 미뤄뒀던 여름옷 정리다. 매년 하면서도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낯설고 싫은지 선선한 바람 부는 게 반갑지 않을 정도다. 말복도 지나지 않았는데 좀 이르지 않나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잘 안다. 지금부터 정리해야 입추 때 끝내고 기분 좋게 처서를 맞이할 수 있다.


군대에서 배운 규칙대로 '이건 해도 되겠지' 하는 행동들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갖고 살고 있고 많은 경우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고 행동하고 있다.

앗. 이건 올여름에 한 번도 못 입었네 '이건 두면 입겠지' 하는 옷들은 대부분 다음 해에도 '입지 않는다'라는 원칙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8할의 확률로 입지 않는다. 그렇게 쌓아둔 여름옷이 제법 많다. 이 이유 또한 명확한데 '아. 이건 두면 언제 언제 입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둔 옷들은 그 '언제 언제'가 생기지 않아 결국 그해 여름을 옷장에서 지내다 다음 해 여름 사라진다.


'이건 사도, 먹어도, 둬도, 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아니, 하지 마'가 우선이다. 사람 죽고 사는 일, 나 먹고사는 일 아니면 일단 '하지 마'가 우선이 되었다. 이런 내 삶의 제1원칙을 깨고 글을 쓰고 있다. 이건 해도 되겠지 중 어쩌면 가장 하지 말아야 했거나 가장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는 글짓기를 하고 있다.

옷정리야 계절 지나서 해도 되는 일이다. 계절이 끝나기 전에 한번 정도는 입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있었거나 혹은 있으면 재밌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도 글짓기라면 그 여지를 두기 위해서라도 옷정리는 뒤로 잠시 미루고 옷정리라는 글감으로 한 꼭지라도 더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혹시 또 아나, 계절이 끝나기 전 입게 된 옷으로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음...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옷정리도 미루고 꾸역꾸역 글을 짓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로 업체 미팅을 하고 춘승과 오랜만에 낮술도 한잔했다. 그게 화요일이었다. 수요일과 목요일엔 오랜만에 들어온 제작 아르바이트를 처리했다. 그렇게 안 써지는 글도 일에 밀려 쓰지 못하게 되니 '빨리 끝내고 글 써야 하는데'라는 조바심도 들었다. 목요일 작업파일을 송부하고 '자... 이제 다시 한번 써볼까.' 했지만, 에너지가 없었다. 빨리 쓰고 싶다는 조바심에 무리하게 진행한 것 같다. 월급 받고 일할 때는 디자인하고 퍼블까지 5~7일 걸리는 일을 이틀 만에 끝냈으니 어지간히도 조바심이 났나 보다. 그래 쉬자, 이럴 땐 제육에 소주 한자 하고 푹 자는 게 좋다. 윤후랑 야구나 보자고 해야겠다.


그리고 금요일 오전, 여전히 기운이 없다. 아니, 써지지 않고 있다.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에 글쓰기'에서 제공한 오늘의 첫 문장은 '나는 오늘 무려 아침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사흘 만에 감았더니 표현 못할 만큼 상쾌하다'인데 월급을 받지 않는 생활을 시작한 이래 아침 6시에 일어난 적도 없거니와 월급도 못 받고 사는 사람 티 내지 않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 문장으로 글을 짓는 건 무리다.

저 문장을 마중글로 제공한 작가님의 의도를 유추하자면 사흘동안 머릴 감지 못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무려 아침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을 수 있었던 건 사건이 아주 상쾌하게 해결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사건과 사건의 해결을 써보라는 의도겠지만.

'없습니다. 지금의 저에겐 그만한 사건도 해결할 일도 없다구욧!'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예전에 사건이라 하기엔 뭣한 이유로 사흘? 길면 일주일정도 머리를 감지 못하고 겨우 세수와 이 닦기, 발 닦기 정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군에 입대하고 의도치 않게 전투경찰로 배치받아 연세대 사태 때 서울로 지원 출동 와서 한 일주일 그랬던 것 같다. 겨우 이 닦는 게 다였고, 일주일을 아스팔트에서 자다가 임시 숙영지였던 동대문 경찰서에서 겨우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최근으로 치자면 지난가을 2박 3일 백패킹 갔을 때 물티슈랑 치실로 버틴 것 같고. 등산하다 발목 골절로 입원했을 때 한 일주일 이만 닦았던 기억이 난다.


가끔 미디어를 통해 보는 작가(글, 음악, 미술 등등)라는 직업군의 사람들을 보면 한 사나흘 정도는 씻는 건 고사하고 식음도 전패하며 창작을 이어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저렇게 꾸미고 즐기고 연애까지 하면서 어떻게 창작을 하지 하는 부류도 있다. 첫 번째는 성공 전이고 두 번째는 성공 후 일까? 그렇진 않을 거 같다.

많은 장르의 작가들이 미디어에 등장하면서 친근하게 대중에게 다가왔고 어떻게 성공한 작가가 되었냐는 질문에 그저 운이 좋아서 잘 팔리는 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에 '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는 김영하 작가의 일화를 생각하면, 또 얼마나 치열한 과정을 거쳤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나흘 못 씻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제공해 주는 글감을 바탕으로 쓰는 이 어쭙잖은 글도 짓기 어려운데 그저 운이 좋았다니요. 그간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 집니다 만, 좀 많이 부럽습니다. 흠! 흠!'


어쨌든 친절한 글감과 과제 덕분에 또 이만큼 글을 지었다. 다행이다. 희망이지만 계속 글을 짓다 보면 언제가 [나는 오늘 무려 아침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사흘 만에 감았더니 표현 못할 만큼 상쾌하다. 써지는 글을 멈출 수 없어 사흘 내내 노트북 앞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기절하듯 잠든 지 두 시간 만에 온갖 종류의 꿉꿉함으로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은 것이다.]라고 쓰는 날도 있지 않을까. 음...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오후의 글쓰기'는 글 짓기에 고민만 하던 나에게 사흘 만에 감는 머리의 상쾌함 만큼 시원한 해결책을 주었고. 이건 해도 되겠지 중 어쩌면 가장 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가장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는 글 짓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매일매일 쓰다 보니 언제 쓰는 게 좋은지, 어떤 상태에서 쓰는 게 좋은지, 어떤 기분으로 쓰는 게 좋은지. 되지도 않는 건방진 고민을 하다가 예전 김연아 선수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런 게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프로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나는 '그냥 하기'엔 의지도 재주도 미약하거니와 불규칙 적인 오후일과로, 가능한 오전에 눈뜨고 양치하자마자 공복에 쓰는 게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루틴이 되었다. 덕분에 새로운 오전 일과가 하나 더 생겼는데 요즘 내가 매일 하는 일 중 최고는 아침 홍삼 챙겨 먹기다. 신기하게도 떨어질 만하면 홍삼을 선물 받는 일이 몇 개월째 이어지면서 홍삼 챙겨 먹기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오전에 눈뜨고 양치하자마자 먹는 이 홍삼의 달큰 쌉싸름한 맛에 으으으으... 몸서리치며 노트북을 여는 즐거움은 꽤나 달콤하지만 글을 짓기 위해 지은 글을 맛보는 순간은 제법 쓰다.


열심히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나름 성실히 짓고 있는 이 글이 큰 재산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다. 이렇게 라도 지은 글이 후에 짓게 될 글들에 대한 밑거름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기대다. 성실히 쓰기 위한 연습으로 혹은 타이핑을 좀 더 익숙하고 편하게 하는 정도의 교보재로, '오후의 글쓰기'라는 책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나름 즐겁게 맛있게 글을 지어보려고 노력 중이다. 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은 글이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해선 안 되는 의심도 해보고 만약 누군가에게 읽힌다면 재밌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얘기하자면 누구나 가슴속에 3천 원 정도는 갖고 있듯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주 작디작은) 야망이 있다. 이걸 듣는 사람은 나를 엄청난 속물이라고 평가할 것 같아 지금껏 입 밖에 내본 적은 없다. 사실 야망이라기 보단 하찮은 욕심에 가깝고 그 욕심이 생기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뭐 하십니까? 글은 잘 쓰고 계십니까?"

춘승의 전화다.

"뭐 그냥 쓰고 있어요."

"어허. 이 양반아 그냥 쓰면 되나. 이왕 이면 잘 써야지."

"이게 노력한다고 막, 잘 되는 일은 아니라서."

"그래도 함 잘 써보세요. 강연이나 사인회 가시게 되면 운전은 제가 해드릴라니까."

"크크크크. 말이라도 고맙네요."

"혹시 한잔 생각나면 넘어와요. 오징어 물회에 소주나 한잔 하죠."


옷정리 정도야 뭐 미룰 수 있다. 그깟 공놀이 하루 안 본다고 치자. 그러나 오징어 물회는 좀 다르다.


"솔직히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근데 뭘 하기도 전에 욕심부터 생기면 정말 속물일 것 같고, 로또도 사기 전에 당첨을 바라는 거랑 똑같은 건데. 그렇다고 로또를 산다고 다 당첨되는 것도 아니고."

"로또 얘기는 가급적 안 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얘기도 지금 쓰는 글에 한 꼭지 나와요."

"와아. 이 양반, 아주 막 갖다 쓰네."

"어지간하면 나도 그냥 내 이야기만 쓰지, 그리고 사실 그때 나도 좀 나오잖아."

"됐고, 나중에 글로 돈 벌면 회나 한번 사요. 오징어회 말고 고급으로. 그리고 그 도움 주신 분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내 이름 빼먹지 말고."


기분 좋은 빚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 도움 주신 분에 이름을 넣어달라니. 이런 빚이라면 3부 5리 이자로 계속 늘었으면 좋겠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지만 이미 도움 주신 분이 한분 생겼다.


"근데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더라고, 차팀장님이 글을 쓴다는 게. 저 양반은 좀 그래도 될 것 같다. 뭐 나쁘지 않아.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글 쓰는 차팀장일 것 같아. 그 나이에 뭘 시작한다는 것도 꽤 괜찮고. 나야말로 뭔가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게 없네."

"오늘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글인데 마음에 팍 박히는 문장이 있더라고요.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라는 문장인데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랍디다. 다 늙어서 글 같은 걸 왜 쓰냐고 묻는 다면 딱 저 말이 정답일 것 같더라고요."

"좋네, 좋은 말이야. 더 놀다가 뭘 하고 싶은 소망이 생기면 그때 뭘 하면 되겠네."


한여름의 오징어물회는 시원하고 달았다. 아직 짓고 있는 글에 '도움 주신 분'이 한 명 생겼고 고전 명작의 문장 하나로 글을 짓는 핑곗거리도 생겼다. 그렇지 못한 글짓기 실력이지만 조금 욕심을 내어 보기로 한다. 어깨에 힘을 조금 빼고 편안하게 쓰기로 한다. 소망하기엔 적당한 나이다.

'일단은 좀 놀고 계세요. 혹시라도 나중에 팔리는 글이 되면 꼭 사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도움 주신 분에 이름도 확인하실 겸'


어쨌든, 작년과는 많이 다른 조금 특별한 계절을 보내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고, 새로운 명함이 생겼다. 일은 하고 있지만 고정 수입은 없다. 매년 그렇듯이 올해의 여름은 지난여름들의 기록들을 여러 의미로 경신하고 있고 기후에 이상기후는 없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하지 말았어야 할 글쓰기를 시작했다. 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캠핑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출퇴근이라는 걸 할 때는 계절에 상관없이 악착같이 시간을 내어 캠핑 가는 것을 좋아했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한 곳을 찾아다녔다. 열차나 버스를 이용했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곳은 도보로 이동했다. 운전을 못하는 불편함은 오롯이 내 탓이라 감수했고 계절의 변화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순응했다. 고속버스보다는 기차 타는 것을 선호한다. 창가자리보다는 통로 쪽 좌석을 선호한다. 나의 이동이 타인에게 불편을 주는 것보다 타인의 이동에 내가 불편한 게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혼자 가는 걸 좋아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굳이 뭘 하거나 하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 가급적 책이 있으면 좋다. 안테나가 달려 있는 구형 라디오는 꼭 챙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라디오 듣는 게 혼자 캠핑을 가는 이유에 8할을 차지한다.


따뜻한 계절에는 맥주 한 캔과 컵와인을 챙기고 추운 계절에는 컵정종과 150ml 플라스크에 위스키를 담아간다. 해지기 전엔 곡소개만 있는 클래식 FM을 듣는다. 책이 있으면 책을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그 이후에는 사연소개가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다. '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에이 설마' 감탄도 하고 걱정도 하고 상담도 해주다 잠이 든다. 깊은 잠을 잘 때도 있지만 낮에 읽은 책과 밤에 들은 사연이 뒤 썩여 상당히 복잡하고 이상한 스토리의 꿈을 꾸기도 하는데 이게 제법 재밌다. 잠에서 깨면 그 맥락 없는 이야기들을 갈무리해 두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무리해 둔걸 나중에 들춰보면 '이걸 왜 굳이 적어두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솔직히 지금 짓고 있는 글 역시 맥락 없는 이야기 같고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짓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 글을 짓기 위해 반추해 본 내 계절들 속의 이야기들이 남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제법 근사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꽤 쓸만한 글감이 되어주었다.

반추할수록 사람이 보였고 자세히 볼수록 이해가 되었다. 여전히 좋고 아직도 밉다. 많이 부족했고 미안했지만 나름 무던하게 애쓴 나도 보였다. 여전히 주위엔 내게 좋은 사람이 있고 그들에게 좋은 내가 있어서 좋다. 그렇게 모나게 산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언젠가 가수 아이유가 콘서트에서 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제가 좋아요?"

(관객)"네~!"

"저도 제가 좋아요."

나는 이 말에 상당하고 치명적인 어지러움을 느꼈다. 외부로부터 오는 타격들은 언제나 나의 껍질을 깨분 순다. 빠지직. '나도 내가 좋다'라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이란! 더 이상 근사할 수 없는 한마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한마디를 주저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햐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에게 물었다. 사실 "제가 좋아요?" 하고 묻고 나서 당연히 "저도 여러분이 좋아요."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 레퍼토리에 금이 갔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저도 제가 좋아요"라는 일곱 음절이 귀에 박힐 때, 심장 위엔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의 바닥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글을 짓는 요즘 아이유의 대답이 크게 공감되었다. 본인에게 애정이 없는 사람이 글을 쓸 수 있을까? 없다고 생각한다. 애정이 있어야 관심이 가고 관심이 가야 질문이 생긴다.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이야기가 생길 것이다. 나에게 애정이 없다면 가장 쉽게 가져다 쓸 글감마저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지 못하는데 타인은 보일까. 나의 삶을 모르고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일어난 일을 반추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쓰는 게 글짓기 라면 일단 나에게 애정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애정이 없다면 애증이라도.


"여러분, 제가 좋아요?"

"어휴 저는 제가 아주 징글징글해요"


사실 위의 아이유 이야기는 손화신 작가님이 쓰신 책 [쩨쩨한 어른이 될 바에는 아이라는 근사한 테도로], 47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오늘의 글쓰기 과제는 베껴 쓰기]였다. 저 문장을 베껴 쓰기 위해 나름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다. 어떤 글을 퍼서 어느 곳에 부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부을 곳을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겨우 공간을 만들어서 부어봤더니 영 아니었다. 그럼 부을 문장을 확고하게 정하고 부을 곳을 거기에 맞게 구성하자는 생각으로 바꿨다. 이 정도 고민은 해야 문장에도 그 문장을 쓴 작가에게도 예의가 아닐까 하는 최소한의 염치였다. 그렇게 만든 공간에 글을 부어보니 나름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이다.


지금껏 받은 문장과 과제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이번 베껴 쓰기 과제는 꽤나 고단하고 많이 즐거웠다. 한편으론 표절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이의 문장을 퍼서 내가 짓는 글의 적당한 곳에 부어야 하는데, 퍼온 문장과 그 문장을 지은 작가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표절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대상에 대한 존경과 시기와 애증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짓지 못하지만 너무 좋아 담고 싶었는데 담아보니 너무 좋았다. 잘 퍼서 잘 다듬고 잘 담아 보니 내 것 같이 예뻐 보였다.'와 '남의 자식 대려다 씻기고 갈아입혀서 내 집에 두니 내 자식 같았다.'의 다름이 있을까?

아직 내 것도, 내가 지은 것도 없는 아마추어가 할 고민은 아니지만 애증으로 갈취한 것과 애정으로 담는 건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과제는 '마음 가는 문장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담아 보세요. 아주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될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막 담는 건 안됩니다. 막 담을 수 있는 실력이 생기면 담을 글을 짓는 실력도 생길 거예요.'라는 응원이라 생각한다.

'손화신 작가님 덕분에 또 한 꼭지 글을 지었습니다 만, 허락 없이 의미 있는 문장을 이상한 곳에 담게 되어 죄송합니다. 과제였으니 이해와 용서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단한 과제였다. 오늘 저녁엔 야구를 봐야겠다.


역전에 역전이었다. 몇십 년 하는 야구인데 그걸 그렇게 못할까. 이겨서 다행이다만 좀 편하게 관람 좀 하도록 하자!. 정말 볼게 못된다. 은근 스트레스다. 오늘은 유난히 홍삼도 쓰다.

다시 쓰기 위해 쓴 글을 읽는다. 다시 읽는다고 어제의 글이 좋아지진 않는다. 어제의 엘지 같다. 그래도 오늘도 기운차게 써보기로 한다. 자, 오늘의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의 말을 좀 빌리겠습니다.

"오늘의 과제는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라 사랑 글짓기 대회'] 라니요.

[저는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전 세계를 힘들게 했던 코로나 19 사태 때 모범적인 방역과 의료 시스템으로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습니다.] 라니요.

단, 1도 공감하지 못한 오늘의 문장이다. 그런 이유로 이 문장을 글감으로 하는 글짓기는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나라가 나라답게 그나마라도 기능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만 외면당하거나 당연히 여기는 정서 속에서도 열심히 충실하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의무를 다하는 일부 훌륭하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분들께는 무한한 감사를 하고 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을 자신 또는 자신의 정당과 정부의 대응, 노력이라고 포장하는 작자들이 싫다. 이보세요 들, 당신들이 자랑하는 국가 방역시스템은 16대 노무현 대통령 깨서 정비하고 만들어 두신 겁니다. 어지간히 포장하세요. 그분의 죽음을 방관하고 그분의 죽음을 거름 삼아 자리에 앉아서 그분을 죽게 한 국가기관의 장을 차기 대통령까지 앉힌 대단한 너희 님들아.

정치를 얘기하거나 논할 깜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난 저당 시의 저 정부가 역겨울 정도로 꼴 보기 싫다. 그냥 싫다. 주는 거 없이 미운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짓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저 글감을 재공해주신 작가님께는 죄송하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누군가는 좋은 글감으로 여기고 기분 좋게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나의 깜냥이 딱 이 정도인 거다. 돈을 받고 쓰게 된다면 다른 태도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런 실력도 그런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


처음 짓는 글이라 친절한 레시피대로 짓지만 그래도 나의 손으로 짓는 글이라 넣고 싶지 않은 재료도 있을 수 있다는 점, 이은경 작가님, 이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정치 얘기로 싸울 생각은 없다. 그냥 내가 싫은 것뿐이다. 혹여, 만에 하나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마음이 불편하시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해를 부탁하는 것도 불편하시다면 네, 감수하겠습니다. 뱉은 말에 쓴 글에 책임은 필요하니까요.


나름의 이유로 오늘은 공식적인 나의 공일이다. 공일엔 제육에 소주 그리고 친구들이다. 대신 야구얘기도 정치얘기도 가족얘기도 하지 않기로 한다.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햇수로 30년이 넘었으니 오랜 친구들 맞다. 술도 사고 제육도 샀는데, 내 책 한 권을 안 사준다. 뭐, 원래 뭘 읽지 않는 친구들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도 있는 법이다. 이들에게 책이라니. 그것도 직접 사서 읽어보라니, 어지간하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물론 친구들이 사줄 내 책 한 권 역시 아직 없다. 만약 작은 에세이라도 내 책이 나온다면, 저 인간들은 과연 내 책을 사줄까. 아니 읽어는 볼까 라는 되지도 않는 무척이나 즐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제육과 함께 소주라도 몇 병 깔아 두고 한 권씩 강매한다면 뭐 좀 사주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장면도 상상해 봤다. 속물이다. 난.


야구이야기, 정치 이야기, 가족얘기도 빼고 보니 드라마 얘기밖에 없다. 남자들끼리 뭔 드라마 얘기냐 할 수도 있지만 낚시하러 가서 공중파 주말 드라마로 밤새 떠든 적도 있다. 갱년기에 접어든 남자라는 종은 그렇게도 진화한다.


"와~씨. 나, 왜 우리 와이프가 욕하면서 본방사수 하는지 알겠더라니까. 쓰레긴데 보게 돼. 막 욕하면서 보게 된다니까"

"야, 그걸 왜 스트레스받으면서 보냐"

"아니 욕하면서 본다니까. 야구 보는 거랑 같아"

"에헤이, 아무리 그래도 야구랑..."

"다를 게 있냐? 자기들은 나름 주인공이고 드라마라고 생각하는데 보는 사람은 그냥 뭐 욕만 나오는 거지.

승재 니는 그런 거 쓰지 마라."

"저것도 돈 된다고 하면 쓴다고 할걸?"

"뭐라도 쓰면 한 권씩 사주긴 할 거냐?"

"야구 끝나면 10시야. 자야지. 뭔 책을..."

"수요일만 조심하면 한 권 정도는 사줄지도"

"수요일은 왜?"

"재활용 버리는 날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만에 하나라도 나의 이름으로 된 출판물이 나온다면 한놈은 자기네 버스회사 기사님 수만큼 구매해서 돌릴 것이다. 한놈은 제수씨한테 '승재 책 이래, 아파트 부녀회 수만 큼 사 왔어. 돌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놈은 매년 찍는 자기 회사 다이어리와 함께 내 책을 함께 배포할 녀석이다. 한놈은 뭐 컵라면 뚜껑으로 쓰겠지만, 항상 부르면 와서 제육을 함께 하는 친구니 예외로 하자.


월례를 함께 했고 지금은 틈만 나면 만나는 이 친구들을 고등학교 때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의 진로도 전공도 직업도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야구 좋아하고(보는 것만), 술 좋아하고, 제육볶음을 좋아한다 정도다. 고등학교 때의 나와 친구들은 잘 나가는 [나의 고등학교 때는 일진이란 단어가 없었다. 그냥 좀 잘 나간다. 또는 운동부다. 또는 밴드부다. 또는 좀 많이 잘생겼다. 그런데 공부도 잘한다. 근데 애가 성격도 좋다 정도] 부류는 아니었지만 소위 잘 나간다는 애들과 친한 정도 라고 할까. 실제와는 다르게 과대평가받는 느낌이랄까.

특별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아닌데 학교에서 운영하는 진학반에 뽑혀서 가끔 서로 놀라고 잘생기진 않았는데 불쾌함을 주는 정도는 아니라 미팅 땜빵 나가는 정도며. 전투력도 없는데 괜한 운동부 싸움에 불려 나가서 몸빵 하는 정도다.

그럴 때마다 '나를? 굳이 왜?' 이 정도의 의문을 갖는 부류였으며 이런 부류의 애들이 본의 아니게 자주 마주치다 보니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여전히 무난하고 모난 곳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제육과 소주를 함께 나누며 각자의 계절 속에서 계절을 공유하며 야구를 보고 있다. 감사한 친구들이다.

아무튼 친구야, 노선 많은 큰 버스회사로 옮길 생각 없니? 넌 좀 더 큰 단지의 아파트로 이사 갈 계획 좀 세워보렴. 친구야 올해는 거래처 확보 좀 더 해야지. 그리고 안 서운해할 테니 넌 장가 좀 가라.


나름의 공일을 행복하고 알차게 보냈다. 쉽게 생기지 않을 고마운 날이고 쉽게 생기지 않을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마음이 말랑해진다. 쉽게 생기지 않을 행복했던 계절과 쉽게 생기지 않을 행복을 준 사람도 떠오르는 날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일 때 여의도엔 인라인 스케이트가 열풍이었고 수많은 동호회가 싸이월드에 창궐할 때였다. 유행을 따르는 부류는 아니지만 유행을 선도하는 인간들이 옆에 있는 이상한 부류였던 난,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고 동호회에 가입했으며 운영진까지 하고 있었다. 온 나라가 축제였고 눈부신 계절이었다. 축제는 다시없을 큰 영광과 함께 끝이 났지만 그 계절이 계속되길 원하는 눈부신 계절의 젊음은, 축제가 계속되길 원했고 동호회 게시판엔 운영진에게 바라는 글들이 넘처나기 시작했다.


'다른 동호회는 MT도가고 투어도 가는데 우린 안 가나요?'

'우리도 제주도 가요.'

'너무 강습위주로 동호회를 운영하는 것 같아요. 물론 동호회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 것도 올치만 직장인이 100%인 동호회인데 적당한 침목 모임이나 워크숍 정도는 좋지 않을까요. 다들 성인이고 책임감 없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워크숍 추진 투표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일리 있는 말씀이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들 성인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요. 사람일 모르는 겁니다.'라는 생각도 했지만 운영진 회의 결과 투표라도 해보자 라는 결론이 나왔다. 투표도 안 하면 당장 탄핵이라도 할 분위기였다. 뭐, 당연하게도 압도적인 찬성으로 제주도로 워크숍을 가는 걸로 결정되었다.

참여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 워크숍 기간은 최소 무박 1일부터 최대 6박 7일까지였다. 그 기간 동안 자율 참여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다. 워크숍 주제는 '제주 해안도로 인라인 스케이트 일주'였고 일정별, 코스(난이도) 별 참가 신청을 받았다. 원하는 날 와서 자신에게 맞는 원하는 코스를 타고 원하는 날 가는 형식이다.


동호회 개설 시기부터 참여했던 나는 대부분의 회원들과는 이미 친분이 있었고 그 당시 신입회원 강습을 진행하고 있어서 가능하면 최대한 신입회원들과 함께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문제는 신입회원 참여기간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다들 직장인이고 소중한 월차와 연차와 휴가를 당겨서 참여했을 것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난 꼬박 7일을 제주에 있어야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 휴가는 충분히 쓸 수 있는 상황인 건 다행이었지만 좀 위험한 일정이었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함께하는 신입 여자 회원이 있었다.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멋지게 달리고 싶은 욕심에 비해 조금 부족한 그녀의 체력은 같이 달리던 무리에서 종종 벗어났고 나는 종종 그녀를 챙겨야 했다.

계절은 빛나고 있었고 섬은 아름다웠다.

7일간의 제주도 워크숍은 무사히 끝났다. 후기와 영상들이 게시판을 채웠고 가을에 한번 더 가자. 아니다 이런 행사는 분기별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갖가지 염문설도 퍼지고 갑작스럽게 신규회원이 늘더니 꾸준히 참여하던 일부 회원들의 탈퇴도 있었다.


무리에서 종종 벗어났던 그녀와 종종 그녀를 챙겼던 나는 추운 계절이 오기 전까지 종종 제주도로 워크숍을 갔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갖고 간 기억은 없다. 둘 다 오설록의 녹차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제주에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항상 들려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만들었다. 행복한 계절이었다.

늘 그랬든 계절은 바뀐다. 녹차 아이스크림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청량감을 느끼기엔 추운 계절이 왔다. 그녀와 함께한 계절은 행복하고 달콤하고 청량감으로 가득했다. 계절이 바뀌는 게 아쉽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 아니 그만큼이나 행복했다. 그녀의 결혼식날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는 그녀의 앞날을 축복했다. 축하하는 나에게 한껏 미소 짓던 그녀가, 그녀의 계절이 다할 때까지 행복하길 기원했다.


지난 휴가지는 오랜만에 찾은 제주도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오설록이다. 나는 여전히 그곳의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기도한다. "그대 행복하기 바람"

만에 하나라도 지금 짓는 글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발전된다면 달콤하고 청량했던 계절의 그녀가 읽어줬으면 좋겠다. 아니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읽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겠지만 많은 의미로 나에게 응원과 위안과 안부인사가 될 것 같다.


"우연한 계기로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글 읽기를 좋아하고 녹차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축하해 준 덕분에 그 사람과 여전히 사랑하며 살고 있고 행복합니다. 지금 나의 계절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청량합니다. 우연히 읽은 당신의 글이 안부가 되었고 당신의 글을 읽는 것으로 나의 안부를 대신합니다. 당신 역시 행복하기 바랍니다."


상상하기 힘든 상상을 해보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상상이다. 글을 짓는다는 거, 어쩌면 꽤나 행복한 일이고 어쩌면 좀 많이 무서운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은 안부가 되고 어떤 글은 경고가 될 수도 있다. 녹차 아이스크림처럼 어떤 이에겐 달콤하지만 어떤 이에겐 그저 쓰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가능하면 위로가 되고 안부가 되는 글을 짓고 싶다.

아이유가 자신을 좋아하는 만큼 난 나자신을 좋아하진 않는다. 다른 작가들처럼 여행도 취미도 인생도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있어본 적이 없어 버는 방법을 알려줄 지식도 없고 가진 게 없어 지키는 방법을 알려 줄 수도 없다. 존경을 받거나 인생의 지표로 삼을 만큼 성공한 삶을 산 것도 아니어서 누구를 독려하거나 응원하는 글을 짓기는 힘들 것이다.

그나마 밝진 않지만 모나지 않은 성격과 정 없다는 소리는 듣지만 측은지심은 있는 정도, 어지간하면 참지만 엔간히 하라고 소리는 지를 정도의 용기와 남들 피해 안 주고 창피하지 않게 30년 직장 생활했다는 정도다.


딱 이 정도의 인간이 짓는 글이 누군가에게 혹은 그녀에게 안부가 될 수 있다면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전 요즘 이렇게 지낸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저에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정도의 글. 혹은 "모두 다 아시겠지만" 보다는 "전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 정말요? 아. 그렇구나!" 딱 이 정도면 내 깜냥 내에서 행복한 글짓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글이라도 꾸준히 짓기 위해 글감을 찾아 나열해 보자. 아무리 특별할 거 없이 무난하게 살았어도 수없이 많은 계절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했으니 묻어두고 잊어버린 도토리가 꽤 있을 것이다. 이제 도토리를 찾아서 나열해 보자.


A. 이 사람은 에세이를 쓴다더니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01. 추억이 없어 슬프지 않았던 멋없는 아버지

02. 어머니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시거든요

03. 돌아보니 있었고 돌아보면 있는 사람들

04. 사랑만 있던 계절, 이별만 했던 계절

05. 눈에 띄지 않게 애쓰지만 찾으면 있는 사람

06. 좋아하는 건, 가급적 하지 않는 것입니다

07. 재주 없이 먹고 산 게 용하다면 용하달까

08. 있어본 적이 없어 아쉬운 것도 없달까요.

09. 그다지 쓸모없을 수도 있지만 쓸 때는 행복한 글


욕심낸 김에 조금만 더 욕심을 내보자면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도 써보고 싶다.


B. 안녕하세요. 캠핑장, 날마다 카레입니다.

01. 육류든 해물이든 다마네기 부터 볶아야죠

02. 잘 아시겠지만 역시 어제 끓인 카레죠

03. 이 카레에는 땅콩이 들어가 있습니다

04. 역시는 역시 토메이도~!

05. 당근을 골라내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06. 카레요? 겉절이 아닐까요?

07. 결코 카레에 실패는 없습니다

08. 죄송합니다. 면을 넣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09. 그다지 맛은 없을 수도 있지만 끓일때는 행복한 카레


이 정도 모아두고. 이제 저 문장(제목)으로 쓰게 될 이야기에 들어갈 단어들을 찾아 나열해 보자.


기능장애, 사실외곡, 적자생존, 악전고투, 우생마사, 카피라이터, 어머 나 혹시, 감탄, 자뻑, 공감, 질책, 글짓기, 꾸준함, 아버지, 어머니, 친구, 야구, 낯설다, 계절, 원칙과 규칙, 술과 안주, 금기, 기억, 유희, 봄, 친구, 위로, 계절, 섬, 소망, 기도, 01410, 새로움, 차이, 위로, 미안함, 사과, 소망, 사명, 빨간 팬, 순댓국, 잠자기, 스티브 잡스, 카카오톡, 매 맞는 아내, 가스 라이팅, 주님과 사장님, 캠핑, 기차, 책, 라디오, 사연, 꿈, 취하다, 놓치다, 카레, 양파, 캠핑, 정, 일상, 미안함, 도리, 생겨먹다, 어지간하다, 고집부리다, 눈치, 고자질, 저항, 몸부림, 서운함, 염치, 속물, 능력


또 한 꼭지의 글쓰기 과제를 마무리했다. 글감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짓고 싶은 글의 제목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해두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마추어적 발상이다. 내친김에 제목을 지으면서 그려본 이야기의 단어들도 모아봤다. 문장과 단어를 모으면서 많은 생각과 상상을 했다. 대부분은 기억 속에 있던 것과 있었지만 잊은 것들을 떠올렸다. 떠올리며 이불킥도 하고 쌍욕을 퍼붓기도 했다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떠올린 기억에 조금씩 살을 붙이다 보니 찾은 문장들과 단어들로 글을 짓고 싶다는 욕심과 설렘으로 되지도 않은 일을 마치 된 것 마냥 즐거웠다.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날생각부터 한 것이다. 역시 속물이다.


각설하고, 이번 과제를 하면서 큰 질문이 하나 생겼다. 도대체 작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어떻게 끊임없이 글을 지을 수 있는지. 삶을 일상을 매일을 과거를 문장과 글감으로 반추하는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보이는 모든 걸 문장과 단어로 갈무리하는 능력이 있는 건지, 혹은 시선과 시점의 스위칭이 남들보다 빠른 건가? 아니면 써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자연선택적 작가라는 개체로 진화되는 건가? 하는 갖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납득해 버렸다. 그런 사람들이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저렇게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다가 혼자 납득해 버린 (아마추어 주제에 욕심만 가득한 속물인) 나는 이와 관련된 행복한 상상을 잠깐 해보았다.


[지인으로부터 재밌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쓴 책 '오후의 글쓰기'를 바탕으로 재밌는 시도를 한 글이 있다는 것이다. 제목은 '레시피 대로 짓는 글 - feat. 오후의 글쓰기'라고 한다. 내가 책에서 제시한 문장과 과제로 글을 지어보겠다는 재밌는 발상이었다. 물론 그러라고 그렇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성스럽게 쓴 책이다.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해서 짬을 내어 읽어 보았다. 글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기로 하자. 이 부분은 나보다도 이 커뮤니티를 방문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더 잘해줄 것이다.

대신 고맙게도 나의 책으로 첫 글짓기를 시도한 이분께 작은 용기와 응원을 보내는 의미로 이분의 거침없는 질문에 답을 드리고자 한다. 작가들은 삶을 일상을 매일을 과거를 문장과 단어로 반추하는 능력이 있냐고요? 항상 시선의 끝에 보이는 모든 걸 글감으로 갈무리하는 능력이 있냐고요? 짧게 답해드리겠습니다. '너도 있네.']


이 욕망 덩어리는 이번 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또 저런 상상으로 과제를 해결했다. 이번 과제는 드라마 속 명대사를 찾아 나열하는 것이다. 좋은 드라마도 많고 그 속에 좋은 대사들도 많다. 어떻게 그렇게들 쓰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질문이 생겼고 상상을 하다가 나름의 납득을 해버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위로와 응원도 할 겸 몹시도 건방진 상상을 했고 정말 정말 듣고 싶은 대답으로 과제를 대신했다. 나에겐 저 짧은 두 마디가 최고의 명대사이다.

'너도 있네.' -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신이 캐나다로 순간 이동한 능력에 대해 감탄하는 은탁에게 -


읽히지 않는 글이 된다 해도 상상만으로 즐거운 과제였다. 이만큼이라도 쓴 나에 대한 작은 위로이자 응원이다. 또다시 작가님께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런 상상마저 없다면 글을 짓는 게 좀 많이 고단할 것 같았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상상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덕분에 혼자 많이 웃고 많이 울기도 한다. 가끔 사랑했던 사람의 현재 일상을 상상해 볼 때가 있다. 무척이나 고맙고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행복한 일상을 상상하다 조용히 웃고 그 사람에게 못 댔게 했던 내가 떠올라 미안한 마음에 용서를 구하며 울기도 한다. 상상의 끝엔 항상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기도하지만 그때의 미안함은 영원할 것 같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어디론가 숨는 정도가 아니고 나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다. 어쩌자고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날 그 사람은 조용히 얘기했다. 착한 그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나에게 얘기한 것뿐이다.


"집에서 승재 씨 만나는 걸 반대하세요. 너 정도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하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하기가 힘들었어요. 사랑한다라는 걸로 설명이 부족한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어쩌면 좋죠."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식을 올렸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부모님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축복받는 결혼식이었고 결혼 1년 만에 예쁜 딸도 낳아서 행복하게 지낸다고 한다. 그 사람의 지인으로부터 들은 소식이다. 나와 헤어지고 이별에 대한 슬픔보다는 나에 대한 걱정으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꼭 그렇게 얘기했어야 했냐고 그 사람보다 더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사실 당신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는 거 모르는 거 아닌데, 이렇게 들으니 명확하게 알 것 같아요.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행복하지만 욕심 같아요. 당신 부모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나정도의 사람에게 과분한 사람 맞아요. 그렇게 해요."

"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그냥 작은 확신이면 되는데. 난 그냥 그 정도의 용기만 주면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아니. 부모님 말씀대로 해요. 저 많이 부족한 사람 맞아요. 많이 감사했어요."


난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만약 작은 확신을 주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관계를 이어 나갔다면이라는 상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주제도 되지 않거니와 자격도 없다. 그 사람의 지인에게도 나의 친구들에게도 나쁜 놈, 몹쓸 놈, 모지리, 병신, 한심한 새끼라는 욕을 먹다가 '차라리 잘했다. 니 주제에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평생 그렇게 좋은 사람 놓치고 살아라'라는 저주성 조언을 듣게 되었고 지금껏 그렇게 살고 있다.

더 이상 좋은 사람은 없다. 다행히 혹시 모를 좋은 사람에게 상처 줄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름 조언에 대한 실천은 잘하고 있어 좀 많이 다행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좋은 사람 있는데 만나보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사람이요? 근데 왜 저를? 어휴 큰일 나요. 저를 모르셔서 그래요. 안 돼요."

나름 아직까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저주성 조언을 하던 친구들이었지만 요즘은 가끔 위로 비슷한 걸 하기도 한다.

"잘한 거야. 솔직히 그건 아니었어. 니 좋아하고 사랑한 건 알지만 안될 일이었어. 결혼해서 잘 산다며. 그럼 된 거야. 니가 잘한 거야. 한잔 해."

아. 이 새끼를 어떻게 하지...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를 입에 처넣고 싶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잡부집에 모였다. 이 친구들 뿐만 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 어울리던 놈들과도 자주 오던 단골집이다. 그때도 고등학생한테 술을 파는 건 불법이고 안될 일이었지만 파장시간에 슬쩍 앉아 잡부 몇 인분 시키면 사장할아버지가 슬쩍 소주 몇 병 주시곤 했다. 사장 할머니가 애들한테 술 주면 어떡하냐고 윽박지르셔도 "얘들 엄한 데 가서 술 먹고 사고 치는 것보다 여기서 가볍게 한잔 하는 게 아싸리 안전한 거야. 많이 먹지도 않더만. 파출소도 가깝고 괜찮아."

지금은 사장할아버지의 사위가 대신 영업하고 있다. 경기도라고는 하지만 서울에 가까운 동네고 나름 중심상권에 있지만 재개발 재건축 사업에도 이 잡부집이 있는 먹자골목은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에겐 다행이고 사장할아버지나 사위사장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굳이 타 도시에서 이 잡부집을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리지널 로컬 맛집이다. 간혹 동네 단골이 직장동료나 지인과 함께 오는 일은 있지만 그들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는 신기한 집이다. '마포집'이라는 아주 오래된 낡은 간판도 있지만 이곳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냥 잡부집이라고 부른다. 돼지 목살이 주요 메뉴고 '돼지 목살'이라고 메뉴가 버젓이 붙어 있어도 '사장님 잡부 둘이 요'라고 하면 알아서 주신다. 간혹 '저희 목살 2인분이요'라는 소리가 나면. 응? 그런 메뉴도 있어? 하면서 쳐다보다가 아.. 내가 먹는 게 목살이지. 하고 웃는 경우도 종종 있다.

투박하게 썰은 돼지목살과 역시나 투박하게 썰은 버섯, 대파를 두꺼운 석쇠에 올려 소금 툭툭 뿌려 연탄불에 초벌 한 후 역시 연탄불이 있는 테이블에 석쇠 채로 내어준다. 육즙이고 불향이고 식감이고 그냥 맛있다. 고춧가루 몇 개 보이는 파절이도, 빨간색 겨우 나는 김칫국도 그냥 맛있다. 여름엔 바지 걷고 양말 까고 물수건 들고 땀 훔치며 먹는 게 일상이고 겨울엔 냄새고 뭐고 외투째 입고 먹는 게 다반사다.

이 집은 우리에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최고의 맛집중 하나일 것이다. 내일도 오늘처럼 어제와 같이 그녀도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고 잡부집도 오래오래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아, 이 새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 그만하고 한잔해. 잘한 거라고 몇 번 말하냐."

"둬, 야, 2차 어디 가냐."

"소금구이 먹었으니까 양념 먹어야지. 제육 먹으러 가자. 쌈 땡긴다."


이 친구들도 오래오래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숙취는 없다. 생각보다 개운한 아침이다. 홍삼도 달고 기분도 상쾌하다. 노트북을 열었으나 어제까지 쓴 글을 읽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막 '이 친구들도 오래오래 이대로였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책을 보니 이제 마지막 과제가 남았다.

'고쳐 써보기'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고쳐 쓰기엔 고칠 곳이 한두 곳이 아니고 다시 쓰기엔 너무 많이 썼다.


죄송하지만 작가님, 고쳐 쓰는 건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쓰는 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새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찾아둔 문장과 모아둔 단어로 새로운 글을 짓는 걸로 마지막 과제를 대신하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여전히 앞으로도 글을 지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신 이은경 작가님에게

이렇게 여전히 앞으로도 한 사람의 행복을 기도할 수 있게 해 준 단 한 명뿐일 그 한 사람에게

이렇게 여전히 앞으로도 저주와 조언과 위로와 응원을 해줄 친구들에게

이렇게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을 장소와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첫 번째 나의 글짓기 "레시피대로 짓는 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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