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문장을 연결할 나의 손끝으로
시선.
분명 나를 향한 시선이었다. 그것도 제법 가까운 거리다.
내 뒤엔 막힌 벽이 있을 뿐이고 이 공간에 나를 제외한 사람이라곤 모니터로 시선을 차단한 채 타이핑 중인 여자 한 사람, 그리고 우측으로 낸 유리창 너머 치하철 역사 내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진다. 끌끌 거리며 혀 차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그런, 조금은 신경질적인, 그리고 연민과 측은함이 썩여있는 시선이다.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바로 옆,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타이핑 중인 나의 손마디를 훑고 모니터 속에 새겨지는 단어를 쫒던 그 시선은 최종에는 모니터를 바라보는 나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연민과 측음함으로 시작된 그 시선은 잠깐 신경질적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체념? 아니, 어디까지 버틸지 두고 보겠다는 조금의 기대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악의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도리질을 치며 노트북 모니터 속 쓰고 있던 글을 다시 읽어 본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은 김람우와 정희완이다.
고등학생인 이 둘은 만우절 장난으로 서로의 이름을 교환한다. 교환한 이름으로 지내던 어느 날 희완은 람우를 위해 람우의 이름 '희완'으로 이벤트에 응모한다. 거기서 람우는 희완의 이름으로 죽게 된다. 세월이 지나 어느 날 희완의 앞에 죽은 람우가 나타난다. 희완의 생을 거두기 위한 저승사자로.
드라마 제목은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다.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일 때 여의도엔 인라인 스케이트가 열풍이었고 수많은 동호회가 싸이월드에 창궐할 때였다.
"당신이 돼보고 싶은 것, 혹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동호회에 올라온 게시글이었다.
[저승사자. 사랑하는 이의 생을 거두워 보고 싶다]
나의 댓글이었다.
드라마를 보던 중 당시 동호회 게시글과 나의 댓글이 떠올랐다.
추억이 없던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고 아버지의 투병기간 동안 사귀던 여자는 헤어진 뒤였으나 아프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된 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내가, 사랑하는 이의 생을 거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고 이런 상상을 해본 것 같다.
'표정이 왜 그래?'
'표정? 우리에게 표정이라는 것도 있었나? 그럼, 연민?'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그녀였어. 내 임종을 지켜봤던'
'흠. 행정 착오인 것 같은데. 힘들었겠네'
'뭐, 그냥 일이었어. 당황한 건 그녀 쪽이고. 단지 당황한 그녀의 눈빛이 안도인지, 불안인지, 의심인지 모르겠더라고. 분노 같기도 하고. 그 생각을 잠깐 했어'
'죽음이잖아. 어느 쪽이든 당연한 반응 같은데'
'딱히 어느 쪽이든 관계는 없는데... 그냥 생각이 많았을 뿐이야.
연민이 그녀를 향한 건지 나를 향한 건지 그게 궁금헀어'
다행이라 생각한 건 사랑하는 이보다 내가 먼저 죽었을 것이라는 전재와 그이의 사랑이 거짓이었다 해도 그 정도면 보상이 될 것 같다는 안도감이었다. 이렇게 못돼 먹은 나는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세 번째 정주행 중이다.
여기까지 읽고 다시 손끝을 바라본다.
'이제, 어쩔거야?'
첫 글쓰기 과제는 [오늘부터는 그냥 쓰는 겁니다] 이고
주어진 첫 문장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은 ○○○인데..." 이며, 난 그렇게 주어진 첫 문장으로 글을 하나 지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첫 글쓰기의 첫 번째 과제를 수행하는 중이다.
다시 시선이 느껴진다.
그저 연민과 측은함이었지만 일말의 기대를 바라던 시선은 다르게 변해 있었다.
"왜요? 뭐가요? 뭘 그렇게 쳐다 보는데요!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난, 처음이라고요! 씨... 어쩌라는 거야. 증말..."
신경질 썩인 나의 투정에도 그 시선은 나의 손가락 끝으로 향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 다음 문장을 어떻게 연결해서 쓰시겠습니까?"
빌어먹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나의 글쓰기. 어쩌면 가장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 훌쩍. 패앵~! ] 그래서요, 다음 문장이 뭔데요?"
다시 나의 시선은 나의 손끝으로 향하고
그 시선은 문장의 끝으로 향한다.
- 짧게 '지어낸' 이야기 [ 시선이 시키는 대로 손끝은 나아갔다 ]
참, 게으른 사람입니다.
미리미리 써두면 될 것을 뭐가 그리 바쁜지 연재일이 되어서야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네, 노트북을 열긴 했습니다. 음. 노트북 뚜껑을 열었네요.
흠. 그럼 이제. 뭘 써야겠죠?
가만 있어 보자. 목차가.
[작가 선생님, 그 우선이 아니 된답니다] 미친,
어쩌자고 이따위 제목을 지은거야.
그러니까. 오늘 연재글이.
아!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의 글쓰기'가 주제 였구나.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마음과 태도"라.
아이고 말이 쉽죠. 제가 지금 노트북 뚜껑을 연지가.
일단 제목부터 바꿉시다. 그러니까 제목을...
다쓰고 바꾸도록 하자.
방향은 알지만 도착지는 모르니.
네, 그렇게 쉽게 떠오를 리가 없겠죠. 재미없게.
그럼! 이야기부터 지어봅시다!
음, 첫 글쓰기를 떠올려 봤습니다.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글을 써야 했죠.
어떻게 써야 할까요? 모르죠. 알리가 없죠. 검색을 해봅니다.
[ 글쓰기 ]
요즘 힙한 취미가 독서라더니 글을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도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가 문장 하나를 발견합니다.
[자발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어른을 위한 따뜻한 문장들...]
"호오~! 딱 나네!" 반가운 마음에 제목과 목차를 봅니다.
[오후의 글쓰기_ 이은경 지음]
1강. 일단 시작합니다.
: 네?
2강. 쓰라고 시킨 사람이 없다는 사실.
: 그... 렇겠죠?
3강.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
: 아.. 마도. 그... 렇겠죠?
: 근데요. 저기, 작가님. 책 표지에 분명 따뜻한 문장들이라고..
: 그래도 읽어보면 따뜻한 문장들이 나오나요?
: 그럼, 믿고 일단 시작합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었을까요.
정말 책 속 작가님이 시키는 대로 끝까지 썼습니다. 23강까지의 과제와 제시된 문장들로 23일간 썼더니 글이 하나 나왔습니다. 저의 첫 글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뭐, 작가님 말씀처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겠지만요.
(그래도 얼마나 기쁘던지요)
그렇게 얻게 된 필명 '글 짓는 날 때',
그렇게 해준 나의 은사와 같은 책.
몰랐는데 지금 보니 책 표지에 문구가 하나 더 있었네요.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마음과 태도]
이제부터 속이 빤히 보이는 시시하고 하찮은 핑계 집어치우고 그냥 좀 앉아서 쓰기 시작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려고 합니다. 쓸 거면 좀 더 매끄럽게 잘 쓰든가 재미있게 쓰든가 하라고 읊어대겠습니다.
p.7
다음 날이 되었나요? 어제 쓴 글을 열어보세요. 어제의 내가 얼마나 형편없이 썼는지 마주할 시간입니다. 피할 수 없어요. 글을 읽으면서 '이거 뭔 소리야'싶은 부분을 하나하나 고치세요. (중략)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고 하나씩 여유롭게 고쳐나가면 됩니다.
p.62
그냥 틈틈이 좀 썼어. 하고 무심한 척 놀라게 해 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어른 개구리들의 비밀스럽고 은밀한 글쓰기를 시작합시다.
1부를 마치며
그저, 지금, 뭐든 읽고 있으면 잘하는 겁니다. 읽으면 쓰게 되고, 더 읽으면 잘 쓰게 되거든요.
p.155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피식 웃을 때가 있습니다. 대단히 위트가 넘치는 글을 쓴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써보자.'
p.190
info.
에세이_「오후의 글쓰기」_이은경 作 / 큐리어스(Qrious)
그리고 지금도 꽤나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과제_
"내 글에 꼭 한 번 넣어보고 싶은 나만의 단어 도토리를 모아 주세요"
tmi.
단지 쓰는 것에 대한 지침서가 아닙니다. 어른의? 아니, 아직도 성장하길 바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 입니다. 그리고 쓰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읽는 것에 대한 정말 많은 격언과 문장들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epil.
제가 모은 단어 도토리요?
음... 젠장, 빌어먹을, 결국, 털썩, 그럼에도, 도대체, 어쩌자고, 불안, 초조, 실소, 떨림, 치밀다, 떠밀리다... 그리고 뭐가 있을까요. 아직도 모으는 중인데 저 모든 단어가 따뜻하게 혹은 유쾌하기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서모으고 있습니다. 좀 별나긴 해요.
그런데, 제목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